[씨줄과 날줄] 단오 풍경
곧 단오가 다가옵니다. 바로 다음주 목요일이 단옷날이군요. 뜬금없이 단오라니, 그건 이미 잊혀진 명절이 아닌가 여기는 분들도 많을 겁니다. 옛날엔 단오가 4대 명절이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도 드물지요. 민족의 큰명절인 설 외에 대보름 한식 단오 추석, 그렇게 네 명절을 크게 쇠었던 거지요.

지금은 한장군 축제를 겸한 경산의 ‘자인단오’와 영광굴비로 유명한 ‘법성포단오’ 그리고 우리나라 단오제의 대명사와도 같은 ‘강릉단오’만 남았습니다. 특히 강릉단오제는 유네스코 ‘세계 인류 무형유산 걸작’ 중 하나로 선정됐습니다.

그때 함께 신청 접수된, 단오 명절의 유래와 기원의 원전이 되는 ‘중국의 단오’를 누르고, 또 우리나라에서는 ‘종묘제례악’과 ‘판소리’에 이어 세 번째로 선정된 것이라고 합니다. 중국의 단오는 전설 속의 명맥만 남았지만, 우리의 단오는 그런 전설과 생활 속에 축제로 남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올해는 단오가 다른 해보다 열흘쯤 늦게 왔습니다. 음력 날짜로는 매년 5월 5일이지만, 부처님이 오신 초파일이 어느 해는 조금 빠르게 오고, 또 어느 해는 조금 늦게 오듯 단오 역시 어느 해는 조금 빠르게 오고 또 어느 해는 조금 늦게 옵니다.

보통은 산딸기가 흐드러지게 익고, 울타리를 따라 심은 앵두나무의 초록색 잎사귀 뒤에 앵두 열매가 꽃처럼 새빨갛게 익을 때 단오가 다가옵니다. 지역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중부지방의 경우 아직 익지 않은 매실을 딸 때입니다.

어린 시절 단오는 나뿐 아니라 우리 동네에 사는 모든 아이들의 꿈이었습니다. 단오는 일 년에 딱 하루, 우리가 태어난 대관령 아래의 산골마을을 벗어나 사람 많고 자동차 많은 강릉 시내를 구경할 수 있는 날이기도 했지요. 이렇게 설명하면 어떨까요? 저는 초등학교를 졸업해 중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교회 건물을 본 적이 없습니다. 일 년에 한 번 단오 때 시내로 나가기는 하지만 그건 단오장으로 나가는 거지 일부러 교회 건물을 보러 나가는 것은 아니니까요.

늘 자연과 함께하며, 자연 속에서 자랐던 것이지요. 지금 바로 이 철, 올해는 좀 늦게 왔지만 보통 단오가 목전에 다가오는 지금, 제 기억으로 농촌은 참으로 바빴습니다. 부엌의 부지깽이조차 너무 바빠 누워 있을 사이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동네 어른들은 어떻게 하든 단오 전에 모를 다 심고 좀 더 편한 마음으로 단오 구경을 가는 것을 목표로 하루도 쉬지 않고 모내기를 합니다. 다른 일은 비가 오면 쉬기라도 하지만 모내기는 비가 와도 쉬지 않습니다.

어머니는 어머니들대로 바쁩니다. 들에 나가 있는 아버지를 도와야 하고, 점심을 해 날라야 하고, 또 집집마다 키우는 누에에게 하루도 쉬지 않고 뽕을 따다 먹여야 합니다. 처음엔 그 양이 많지 않지만 나중엔 뽕잎의 양이 소가 먹는 꼴지게 하나만큼 늘어납니다. 아이들인 우리도 바쁩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으레 아버지가 계신 논으로 나가 서툴게 아버지와 함께 모를 심거나 모춤을 나르고 잔일을 거듭니다. 그 즈음 학교도 며칠 농번기 방학을 합니다. 논둑마다 물과 컬컬한 막걸리가 든 주전자를 들고 다니는 것도 우리의 몫입니다. 그리고 단오가 다가오면 아버지와 어머니와 함께 온 가족이 단오 구경을 갑니다. 우리는 이것저것 새로 보는 것들을 사달라고 조르기도 하고, 어른들은 또 이것저것 우리에게 사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난 추억 속에 아버지가 가장 고맙고 커 보였던 모습은 모처럼 만에 양복을 입고 나간 단오장에서 이런저런 진귀한 물건을 사주던 때가 아니라 논밭에서 묵묵히 일을 하는 것 자체로 우리 인생의 진정한 감사와 모범을 보이시던 모습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단오 무렵 모처럼 고향의 옛집을 찾아 빨갛게 익은 앵두 아래에서, 이제 막 따기 시작하는 청매실 나무 아래에서 오래전의 시간들을 돌아봅니다. 이제 농촌의 모습은 예전 같지 않아도 우리 마음 안의 고향은 늘 똑같습니다. 그 고향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십니다. 나이 드신 두 분이 흰 고무신을 신고 저기 논둑길을 걸어 단오 구경을 가십니다.

이순원 <소설가 sw839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