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출구전략 시사에 신흥시장 통화 '직격탄'
인도 루피화 가치가 사상 최저치를 기록했다. 태국, 필리핀 등 아시아 통화 대부분도 약세를 면치 못했다. 미국 경기지표가 호전되면서 양적완화 조기 종료 가능성이 커지고 있어서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10일(현지시간) 루피화는 달러당 58.15루피를 기록, 하루 만에 통화가치가 1.9% 떨어졌다”며 “사상 최저치였던 지난해 6월 달러당 57.32루피를 넘어섰다”고 보도했다. 루피화 가치는 11일에도 하락세를 이어가 오후 3시 현재 달러당 58.85루피를 기록하고 있다.

루피화 가치 하락은 벤 버냉키 미국 중앙은행(Fed) 의장의 양적완화 축소 시사 발언에서 시작됐다. 버냉키 의장은 지난달 청문회에서 ‘경기 회복세가 지속되면’이라는 전제를 달았지만 “앞으로 수차례의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회의 중에 채권 매입 규모를 줄이는 조치를 취할 수 있다”고 밝혔다. 세계 최대 채권펀드인 핌코의 빌 그로스 공동 투자책임자(CIO)는 “Fed가 9월께 양적완화를 축소할 것으로 보인다”고 예상했다.

양적완화 규모가 줄면 미 국채금리가 상승하고 달러표시 자산의 투자 가치가 높아진다. 그만큼 신흥시장 통화에 대한 매력이 떨어진다는 의미다. 이에 따라 태국 바트와 필리핀 페소, 말레이시아 링깃도 각각 5.1%, 4%, 3.1% 하락했다. 사지드 치노이 인도 JP모건 수석연구원은 “통화가치 하락은 인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며 “남아프리카, 브라질, 터키 등 신흥국들이 전반적인 타격을 입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팔라니아판 치담바람 인도 재무장관은 “루피화가 지난 두 달 동안 흐름이 좋지 않았으나 곧 안정된 수준을 찾을 것”이라며 추가 하락 가능성을 일축했지만 시장 반응은 다르다. 인도는 지난해 경제성장률이 5%에 머무는 등 성장 속도가 둔화되고 있다. 투자가 줄고 물가는 오르는 상황이다. 인도 중앙은행은 올 들어서만 세 차례 금리 인하를 단행했으나 경기를 살리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FT는 “통화 하락이 인도 중앙은행에 딜레마를 안겼다”고 분석했다. 경제 성장을 촉진하기 위해 금리 인하가 필요하지만 통화가치 하락이 금리 인하와 맞물려 물가 급등을 불러올 수 있어서다.

경상수지 적자 확대도 우려된다. 사지드 치노이 연구원은 “달러당 57루피를 넘어서는 것은 인플레이션의 시작을 의미한다”며 “석유나 금 등의 가격이 상승해 수입업체들이 어려움을 겪기 시작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인도는 지난해에도 경상수지 적자를 기록했다. 지난 4분기에는 적자 규모가 국내총생산(GDP)의 6.7%에 달했다.

강영연 기자 yy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