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당국회담 무산] 실무접촉부터 꼬인 '格' 싸움…北, 되레 "엄중한 도발" 억지
남북은 지난 9일 실무접촉을 할 때부터 수석대표의 급을 놓고 팽팽한 신경전을 벌였다. 한국 정부는 북한의 대남정책 총괄인 김양건 노동당 통일전선부장이 수석대표로 나서야 한다고 북측을 강하게 압박했다. 정부가 6일 남북 장관급회담을 제의하는 류길재 통일부 장관 명의의 전통문을 김 부장 앞으로 보낸 것도 이를 염두에 둔 포석이었다.

그러나 북한은 강경했다. 북한은 ‘상급 인사’를 내세우겠다고 맞섰다. 실무접촉에서 수석대표의 급에 이견을 좁히지 못하자 한국 정부는 ‘남측 수석대표는 남북 문제를 책임지고 협의·해결할 수 있는 당국자’로, 북측은 ‘북측 단장은 상급 당국자’로 각각 서로 다른 내용이 담긴 발표문을 냈다.

이 같은 실랑이는 11일까지 이어졌다. 남북 연락관은 오후 1시께 판문점에서 만나 대표단 명단을 동시에 교환했다. 정부는 우리 측 수석대표로 류 장관이 아닌 김남식 통일부 차관을 내세웠다. 정부 당국자는 “북한이 실무접촉에서 김양건 부장이 단장으로 나오지 않을 것임을 예고한 상황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김 차관이 수석대표로 적합하다는 판단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북측은 강지영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장을 수석대표로 통보했다. 조평통은 북한의 정부 외곽기구로, 우리의 민주평화통일자문위원회와 비슷한 조직이다. 조평통 위원장과 여러 명의 부위원장 밑에 있는 서기국장은 통일부 장관의 상대로 볼 수 없다는 것이 우리 정부의 판단이다. 하지만 북한은 우리 측 명단에 강하게 반발했다.

북측은 “장관급 인사가 나와야 한다”고 이의를 제기하자 양측은 전화로 6, 7차례 협의를 이어갔다. 북한은 이 과정에서 회담 무산을 암시하며 정부를 압박했지만 이견이 좁혀지지 않았다. 북한은 결국 오후 7시5분께 “남측이 차관급을 보낸 것은 우리를 우롱하는 것이다. 엄중한 도발로 간주한다”며 회담 보이콧을 통보했다. 남북은 이후 접촉 일정도 잡지 않았다.

김형석 통일부 대변인은 “남북 문제를 책임지고 해결할 수 있는 통일부 차관의 격을 문제 삼아 당국대화까지 거부하는 것은 전혀 사리에 맞지 않는다”며 “대화의 문은 열려 있다. 북한은 지금이라도 당국 간 회담에 나오기 바란다”고 촉구했다.

당국회담이 무산됐지만 정부 안팎에서는 남북 간 대화의 불씨가 완전히 꺼진 것은 아니라는 얘기도 나온다.

북한은 7, 8일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미·중 정상회담을 앞두고 남북 당국 간 대화를 제의했다. 북핵 문제가 주요 의제로 논의되는 미·중 정상회담을 앞두고 국면 전환을 위해 남북관계 개선에 나섰던 셈이다. 정부 고위 소식통은 “북한이 오는 27일 열리는 한·중 정상회담과 이달 말 예정된 1.5트랙 성격의 한·미·중 전략대화를 앞두고 새로운 형태의 대화를 제의해올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조수영 기자 deline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