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정 "구제역 살처분 동영상 보며 소설 구상했죠"
2011년 발표한 ‘7년의 밤’이 약 30만부 팔리면서 한국 대표 작가로 발돋움한 정유정 씨(사진)가 신작 장편 《28》(은행나무)을 들고 돌아왔다.

이야기의 무대는 서울에 접한 인구 39만의 도시 화양. ‘불볕’이라는 뜻의 이 도시에 정체불명의 전염병이 발생한다. 첫 사망자를 후송한 구급대원, 치료한 의료진이 모두 사망하고 감염자는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난다. 감염되면 눈이 핏덩이처럼 빨개지고 사흘 이내에 사망에 이르는 이 바이러스에 대해 알려진 유일한 단서는 개와 사람에게 공통으로 전염된다는 점. 정부는 개들을 눈에 띄는 대로 죽이는 ‘살(殺)처분’에 나서고, 그래도 바이러스의 기세가 꺾이지 않자 군대를 동원해 화양을 철저하게 격리한다.

정부가 바라는 건 화양의 원상 복귀가 아니라 화양을 제외한 다른 지역의 안전이다. 작가는 28일간의 긴박한 이야기 속으로 독자를 끌어들인 후 다수의 안전을 위해 소수의 희생을 당연시하는 게, 인간의 안전을 위해 다른 종의 생명을 빼앗는 게 과연 옳은 일인지 따져 묻는다.

서울 서교동 은행나무 출판사에서 12일 만난 정씨는 구제역 파동 때 돼지 생매장 동영상을 보며 이 소설의 시놉시스를 썼다고 했다. 깊은 구덩이 안에서 죽음에 직면한 돼지 수백마리가 울부짖는 동영상이었다. 그는 “먹고 먹히는 게 생태계의 본질이기는 하지만 다른 종에 대한 존중과 감사가 기반이 돼야 한다”고 했다. ‘다수와 소수’라는 인간 사이의 갈등도 마찬가지. 작가는 한센병 환자들의 소록도 격리를 당연시하는 여론에서 소수의 희생에 대한 인간적 배려와 감사가 없는 한국 사회를 봤고, 이 소설의 문제의식으로 이어졌다.

작가의 문제 제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건 역시 특유의 긴박한 이야기 전개다. 그는 이번에도 화양의 모델이 될 도시를 찾고, 그 도시의 지도를 구해 인물과 이야기를 배치하는 방식으로 하나의 세계를 창조했다. 4~5차례 퇴고와 수정을 거쳐 톱니바퀴처럼 빈틈 없이 맞아떨어지는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정씨는 “소설은 누가 뭐래도 이야기의 예술”이라고 강조했다. 역사든 어젯밤 꿈이든 이야기의 방식으로 접근해야 성에 차는 게 인간이라는 설명이다.

“드라마와 영화에 ‘이야기’라는 도구를 빼앗긴 상황이지만 소설만이 한계가 없는 이야기를 쓸 수 있죠. 소설이 이야기를 만들어 낸 후에야 영화가 영상을 구축할 수 있어요. 소설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잘 쓰는 작가가 되고 싶습니다.”

박한신 기자 hansh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