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밀하게 담담하게…가슴에 묻은 메릴 스트리프의 짧았던 사랑
“메릴 스트리프를 어떻게 하면 불러낼 수 있을까.” 작고한 영화배우 존 커제일 특집을 기획하고 있던 미국 TV 프로듀서인 리처드 셰퍼드는 1년 반째 속을 태우고 있었다. 사생활 노출을 극도로 꺼리는 스트리프를 도무지 만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커제일은 ‘대부’ 등 겨우 다섯 편의 영화에 출연, 탁월한 성격 연기로 극찬을 받았지만 골수암으로 42세에 타계한 천재적인 배우였다. 그가 ‘대부’에서 알 파치노의 동생역으로 선보인 연기와 ‘개 같은 날의 오후’에서 맡은 우수에 젖은 은행 강도 역할은 영화 마니아들에게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겼다. 그런 커제일의 드라마틱한 삶을 조명하는 데 있어 스트리프와의 로맨스를 빼놓을 수 없었기 때문에 셰퍼드의 조바심은 클 수밖에 없었다.

스트리프가 커제일을 만난 것은 영화 데뷔 전 연극배우로 활동할 때였다. 1976년 뉴욕의 셰익스피어 페스티벌에서 희비극 ‘법에는 법대로(Measure for Measure)’에 함께 출연하게 된 두 사람은 서로에게 첫눈에 반한다. 예일대 드라마 스쿨을 졸업한 후 한창 뜨고 있던 27세의 스트리프와 이제 막 불혹에 들어선 성격파 배우 커제일은 서로 호감을 갖게 됐고 스트리프는 곧바로 커제일과 동거에 들어간다.

두 사람은 동거 이후에도 몇 편의 연극에 함께 출연했고 장차 행복한 결혼생활을 꿈꾸고 있었다. 그렇지만 정작 둘의 자세한 사랑의 내막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안타깝게도 그들의 사랑이 밖으로 노출된 것은 커제일이 말기 골수암 진단을 받고 나서였다. 스트리프는 자신의 연기 생활을 잠시 접고 커제일을 헌신적으로 간호했는데 그 모습이 사람들의 눈에 띄게 된 것이다. 스트리프의 조력에도 불구하고 커제일의 소생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였다.

커제일은 이 상태로 삶을 끝낼 수 없었다. 연기 현장에서 마지막 예술혼을 불태우고 싶었다. 마침 그때 오랫동안 커제일의 재능을 지켜보고 있던 마이클 치미노 감독이 그의 야심작 ‘디어 헌터’에 출연해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치미노 감독은 월남전 참전 용사의 비극을 그린 이 작품에서 커제일에게 주인공의 친구 스탠리 역을 맡길 생각이었다. 천재적인 연기자의 마지막 연기를 담고 싶었다. 스트리프는 커제일을 현장에서 보살피기 위해 앤젤라 역을 자처했다. 그러나 상태가 생각보다도 위중하다는 것을 알게 된 영화제작사 측에서 커제일을 중도하차시키려 했다. 그러자 주연을 맡은 로버트 드니로와 스트리프는 커제일이 그만두면 자신들도 출연하지 않겠다고 버텼다. 결국 촬영은 시작됐고 치미노 감독은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커제일과 관계된 장면들을 서둘러 촬영했다. 강행군 속에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엄습했지만 커제일은 진통제로 매 순간순간을 버텨냈다.

초인적인 인내로 촬영을 끝낸 커제일은 영화가 채 완성되기도 전인 1978년 3월12일 숨을 거뒀다. 스트리프는 극한의 슬픔을 삼키며 혼신의 연기를 펼침으로써 대스타로서의 성장 가능성을 보여줬고 커제일이 마지막으로 출연한 이 영화는 다섯 개의 오스카 트로피를 거머쥐는 대성공을 거뒀다.

커제일을 잃은 슬픔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던 것일까. 스트리프는 그해 9월 조각가 돈 거머와 깜작 결혼식을 올린다. 이후 두 사람은 네 자녀를 두고 단란한 가정을 꾸렸다. 셰퍼드가 커제일 특집을 준비한 것은 스트리프가 거머와 결혼한 지 30년이 넘은 시점이었다. 한 남자와 30년 이상 반려의 관계를 지속해 온 그에게 단 2년간 동거한 남자와의 로맨스를 이야기해 달라는 것은 누가 봐도 응낙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지만 셰퍼드로선 절박했다. 그는 커제일의 동생 스티브를 통해 스트리프와 만날 방도를 모색했고 스티브는 마침내 한 전시회 오프닝행사에 스트리프가 참석한다는 정보를 얻어낸다. 셰퍼드는 행사에 찾아갔고 결국 스트리프로부터 출연 승낙을 얻는다. 스트리프는 프로그램이 커제일이라는 한 잊혀진 스타를 추모한다는 점에 마음이 움직였다. 이때부터 답답하게 돌아가던 제작에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다. 스트리프의 출연이 결정되자 프랜시스 코폴라 감독, 알 파치노, 로버트 드니로 등 기라성 같은 스타들이 프로그램 출연을 흔쾌히 승낙했다.

그러나 정작 프로그램에 출연한 스트리프는 셰퍼드가 원했던 커제일과의 로맨스와 그가 앓았던 병에 대해 담담히 얘기할 뿐 세부적인 사항에 대해서는 함구로 일관했다. 자신의 아름다운 사랑을 떠벌리지 않고 내밀한 추억으로 간직하려는 마음과 자신과 오래 함께한 배우자에 대한 배려에서였다. 그의 그런 따스한 인간미는 그가 1995년 출연한 영화 ‘매디슨카운티의 다리’의 주인공 프란체스카 존슨을 떠올리게 한다. 15년 동안 함께한 남편이 잠시 집을 비운 사이 우연히 찾아온 사진작가와 불같은 사랑을 나누지만 자신에게 여태껏 행복한 삶을 선사해준 남편에 대한 신의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본래 자리로 돌아가는 그 주인공 말이다. 그것은 스트리프 본인의 모습이었다.

정석범 문화전문기자 sukbum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