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포럼] 국가가 행복을 판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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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원순 논설위원 huhws@hankyung.com
행복은 일요일 밤 최효종이 익살로나 파는 것인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신용불량자용 행복기금에다 전 국민에게 기초연금 떡을 나눠준다며 국민행복연금위원회가 앞서더니 서민용 행복주택에 행복기숙사도 나왔다. 아! 사방의 행복! 모두 정부가 내건 행복 세례다. 또 어떤 행복을 나눠줄까. 행운학자금융자, 행복백수수당, 사업재기행복지원금…? 세대마다 거리마다 행복, 또 행복! 행복은 넘치는데 슬슬 어지럽다.
도대체 국가가 국민을 직접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발상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무슨 전제국가도 아니고 청렴인자형 국왕이 그저 미소나 짓는 은둔의 소왕국도 아니다. 대통령부터 9급까지 상하 전 공무원들이 법에 딱 정해진 대로의 권한과 의무만큼만 봉사하기로 사회계약이 된 공화국이다. 그런 21세기 현대국가다.
행복! 행복! 사방의 행복마케팅
국가가 국민들에게 행복을 나눠준다는 생각은 애당초 할 필요가 없다. ‘공무원=국가’가 아니니 공무원부터 그런 인식을 가질 필요가 없다. 아니, 그런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 국민들도 행여 그렇게 기대해선 안된다. 선거 때 표와 행복의 교환부터가 나쁜 거래였다. 국가가 국민을 직접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순간, 뒤집으면 국가의 이름으로 국민의 모든 것을 간섭하고, 관리하고, 지배하려 들 것이다. 무수히 본 광경 아닌가. 그러니 정확히는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것이 싫은 게 아니라 그 과욕의 슬로건 뒤에 감춰진 공공의 악마성이 무서운 것이다. 정치인과 공무원들이 행정의 결과로가 아니라 직접적으로 국민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고 믿는 순간 시장을 향한 모든 개입도 정당화하려 들 것이다. 이불 속 잠자리 횟수까지 간여할 명분을 만들지도 모른다.
국가론으로 치면 고금의 수많은 현인, 석학들의 논변이 있었다. 무수한 궤변가, 담론가들까지 온갖 주장을 내놨다. 그렇지만 이 시대 현대국가에서, 제법 산다는 선진국 중 줄줄이사탕으로 행복을 정책으로 팔고 경제에 민주화란 깃발을 사방에 뒤흔드는 데가 어디 있나.
이면에 숨은 공공의 악마성
물론 인간은 모두 행복해지려 한다. 그러나 그 행복은 자유 의지인으로 자기 책임에서 추구하는 것이다. 스스로 성취해가면서 대자유인으로 홀로 서는 그 자체가 소중하다. 그런 지난한 노력이 우리네 삶이다. 정책이 이를 거들 수는 있다. 신용불량자 지원책도 때로는 필요하단 얘기다. 저소득층 주거행정 또한 당연하다. 다만 그건 공무원들의 일상업무여야 한다. 행복으로, 민주화로 과포장해 구름위로 띄워선 곤란하다. 정책에 당의정을 과도하게 쓴다면 당장 특혜 시비부터 따른다. 그런 인위적인 불균형은 늘 문제였다. 아무데나 민주를 붙이는 것처럼 통상적인 정책에 행복을 덧대는 건 정신적으로 마약을 뿌리는 행위다. 혹 선의로 시작한들 과잉행정이 결과까지 선을 낳는 건 아니다.
행복정책과 경제민주화 같은 기치는 필시 자유인으로 자활 의지를 꺾는다. 그렇게 국민들이 정부에 과도하게 기댄다면, 지나친 나머지 혹 유포리아(다행증) 증세라도 보인다면, 그 자체로 선거판 포퓰리즘에 중독됐다는 의미다. 그런 구호에 심약한 유권자는 수시로 당한다. 거듭 정부의 행복마케팅이 두려운 이유다.
정부가, 실제로는 스스로 국가라고 착각하는 선출직·임명직 공무원들이 대중을 직접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나서는 순간 독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앞으로도 경계 대상이다. 경제를 민주화해주겠다면서 온갖 법으로 시장을 억누르는 입법 과잉의 국회를 목하 매일 보고 있다. 의회 독재라는, 여의도의 저 통제불능 괴물 말이다.
허원순 논설위원 huhws@hankyung.com
도대체 국가가 국민을 직접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발상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무슨 전제국가도 아니고 청렴인자형 국왕이 그저 미소나 짓는 은둔의 소왕국도 아니다. 대통령부터 9급까지 상하 전 공무원들이 법에 딱 정해진 대로의 권한과 의무만큼만 봉사하기로 사회계약이 된 공화국이다. 그런 21세기 현대국가다.
행복! 행복! 사방의 행복마케팅
국가가 국민들에게 행복을 나눠준다는 생각은 애당초 할 필요가 없다. ‘공무원=국가’가 아니니 공무원부터 그런 인식을 가질 필요가 없다. 아니, 그런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 국민들도 행여 그렇게 기대해선 안된다. 선거 때 표와 행복의 교환부터가 나쁜 거래였다. 국가가 국민을 직접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순간, 뒤집으면 국가의 이름으로 국민의 모든 것을 간섭하고, 관리하고, 지배하려 들 것이다. 무수히 본 광경 아닌가. 그러니 정확히는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것이 싫은 게 아니라 그 과욕의 슬로건 뒤에 감춰진 공공의 악마성이 무서운 것이다. 정치인과 공무원들이 행정의 결과로가 아니라 직접적으로 국민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고 믿는 순간 시장을 향한 모든 개입도 정당화하려 들 것이다. 이불 속 잠자리 횟수까지 간여할 명분을 만들지도 모른다.
국가론으로 치면 고금의 수많은 현인, 석학들의 논변이 있었다. 무수한 궤변가, 담론가들까지 온갖 주장을 내놨다. 그렇지만 이 시대 현대국가에서, 제법 산다는 선진국 중 줄줄이사탕으로 행복을 정책으로 팔고 경제에 민주화란 깃발을 사방에 뒤흔드는 데가 어디 있나.
이면에 숨은 공공의 악마성
물론 인간은 모두 행복해지려 한다. 그러나 그 행복은 자유 의지인으로 자기 책임에서 추구하는 것이다. 스스로 성취해가면서 대자유인으로 홀로 서는 그 자체가 소중하다. 그런 지난한 노력이 우리네 삶이다. 정책이 이를 거들 수는 있다. 신용불량자 지원책도 때로는 필요하단 얘기다. 저소득층 주거행정 또한 당연하다. 다만 그건 공무원들의 일상업무여야 한다. 행복으로, 민주화로 과포장해 구름위로 띄워선 곤란하다. 정책에 당의정을 과도하게 쓴다면 당장 특혜 시비부터 따른다. 그런 인위적인 불균형은 늘 문제였다. 아무데나 민주를 붙이는 것처럼 통상적인 정책에 행복을 덧대는 건 정신적으로 마약을 뿌리는 행위다. 혹 선의로 시작한들 과잉행정이 결과까지 선을 낳는 건 아니다.
행복정책과 경제민주화 같은 기치는 필시 자유인으로 자활 의지를 꺾는다. 그렇게 국민들이 정부에 과도하게 기댄다면, 지나친 나머지 혹 유포리아(다행증) 증세라도 보인다면, 그 자체로 선거판 포퓰리즘에 중독됐다는 의미다. 그런 구호에 심약한 유권자는 수시로 당한다. 거듭 정부의 행복마케팅이 두려운 이유다.
정부가, 실제로는 스스로 국가라고 착각하는 선출직·임명직 공무원들이 대중을 직접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나서는 순간 독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앞으로도 경계 대상이다. 경제를 민주화해주겠다면서 온갖 법으로 시장을 억누르는 입법 과잉의 국회를 목하 매일 보고 있다. 의회 독재라는, 여의도의 저 통제불능 괴물 말이다.
허원순 논설위원 huh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