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어느 在日학도의용군의 꿈
6·25전쟁 당시 조국을 지키기 위해 참전했던 재일동포 청년들에 대한 기사(잊혀진 그 이름, 재일학도의용군 642명·본지 6월22일자 A27면)가 나간 당일 재일학도의용군 고(故) 이춘생 옹의 아들 이준원 씨(49)에게서 연락이 왔다. 고마움을 전하고 들려줄 얘기도 있으니 만나자는 제안이었다.

서울 동숭동에서 만난 이씨는 “선친은 중동전쟁이 터졌을 때 조국으로 돌아간 이스라엘 유학생들 이야기는 우리나라 교과서에도 실렸는데, 6·25전쟁에서 숨진 전우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항상 가슴 아파하셨다”고 말문을 열었다.

재일학도의용군 642명은 일본으로 강제로 끌려갔던 징용자의 자녀들이다. 그들은 “국군이 낙동강까지 밀려, 간신히 부산 쪽만 지키고 있다”는 소식에 펜을 버리고 총을 들었다. 고 이춘생 옹도 두 살 때 부모를 따라 경남 양산에서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씨는 네 살이던 1968년까지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한 재일학도의용군 242명이 몰려 살던 서울 인사동 34에서 살았다. 이씨는 초등학생 시절 어느 해 현충일에 아버지께서 주신 상품권에 대한 추억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빵과 연필을 샀던 그 상품권이 국가유공자였던 아버지께 조국이 내놓은 유일한 보상이었다는 걸 이씨는 철이 든 뒤에 알았다. 정부가 이들에게 연금을 지급하기 시작한 1985년 이전까지 상품권이 참전용사들에 대한 보상의 전부였던 셈이다. 이들이 받는 연금(2012년 기준)은 매달 98만4000원 선으로 다른 6·25 참전용사들과 비슷하다.

현재 일본과 한국에 생존해 있는 재일학도의용군 출신은 30여명. 팔순이 넘은 ‘노병’들이라 예전처럼 자주 만나지는 못한다는 게 이씨의 설명이다. 의용군 자녀들은 얼마 전까지 인터넷 카페를 통해 소식을 주고받았지만, 이마저도 생업에 쫓기다 보니 몇 해 전부터 제대로 운영되지 않고 있다.

이씨는 “아버지 동지들이 살아계실 때 이런 기사가 나와서 다행”이라며 “아버지와 전우들의 행동을 보고 자라나는 학생들이 애국심을 배울 수 있다면 이분들도 미련이 없으실 것”이라고 했다.

6·25전쟁, 63년이 흘렀다.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하기 위해 생업과 학업을 뒤로 한 채 현해탄을 건넌 무명용사들의 순결무구한 애국심을 되새기는 소중한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

홍선표 지식사회부 기자 ricke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