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고메 토마토 젤리
가고메 토마토 젤리
창업 후 100년이 넘도록 외길을 고집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여기 그런 회사가 있다. 일본 최대 토마토 가공식품업체 가고메다. 1899년 창업 후 115년째 토마토를 비롯한 채소 가공식품 사업에 매달려왔다. 당근과 피망 등 다른 채소 가공식품군도 있지만, 토마토 부문이 전체 매출의 약 90%를 차지한다.

‘가고메=토마토’라고 할 정도로 일본의 토마토 가공식품업계에서 가고메가 차지하는 위상은 독보적이다. 토마토 케첩과 주스, 스파게티 소스 등 각종 토마토 가공식품의 일본 내 시장점유율은 약 50%에 이른다.

일본 최초로 토마토 재배

가고메의 창업주 가니에 이치타로는 1899년 일본에서 최초로 토마토 재배에 성공한 사람이다. 젊은 시절 군인으로 일했던 그는 퇴역할 때 상관으로부터 “농사를 지으려면 서양 채소를 재배하는 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조언을 들었다.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 문호 개방이 본격화되면서 일본엔 갖가지 서양 채소 종자들이 유입됐는데, 그중 하나가 토마토였다. 가니에는 첫 토마토 수확 후 토마토 판매 가게를 차렸다. 가고메의 시작이다.

불행히도 토마토를 처음 접한 일본인들은 토마토 특유의 향내를 싫어했다. 수확한 토마토는 창고에 가득했지만 판로 개척이 매우 어려웠다. 그러던 중 가니에는 당시 일본에 와 있던 서양인들이 토마토를 요리하는 방법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날로만 먹을 줄 알았던 토마토를 주스와 소스 형태로 가공하는 것을 본 가니에는 토마토 가공법을 배운 뒤 1903년 토마토 소스를 개발했다. 1906년엔 아예 아이치현에 있던 자택을 토마토 소스 공장으로 개조했다.

2차대전 이후 일본인들의 식습관이 점차 서구화하면서 가고메는 본격적으로 날개를 달기 시작했다. 특히 1960년대에 ‘술을 마신 다음날 아침에는 토마토 주스를’이란 광고가 대히트를 치면서 매출이 급성장했다. 2012회계연도 가고메의 매출은 전년보다 9% 늘어난 1962억엔, 순이익은 53.7% 증가한 64억엔을 기록했다. 토마토 가공식품이라는 한우물을 파면서 매출 2조원이 넘는 회사로 급성장한 것이다. 여세를 몰아 가고메는 미국과 중국, 이탈리아 등에도 진출했다.

가고메가 승승장구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상품 다각화의 명목으로 본래 주력 상품인 토마토 및 채소 가공식품을 벗어나 식자재 수입과 음료 자동판매기 사업 등에 나섰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고객들은 토마토를 벗어난 가고메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가고메는 2000년 자판기 사업을 처분하며 “‘자연 친화’라는 본연의 자세로 돌아오겠다”고 선언했다.
토마토 농사에 IT 접목…'스마트 아그리'로 100년 먹거리 만든다
“우리의 제1공장은 밭이다”

가고메가 가장 중시하는 경영철학은 “밭이야말로 제1공장”이다. 좋은 밭에서 양질의 토마토가 나오지 않으면 소비자들이 만족할 만한 품질의 가공식품을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가고메는 원료를 시장에서 사오는 다른 식품 가공회사들과 달리 창업 초기부터 농가들과 장기계약을 체결해 토마토를 직접 공급받았다. 1998년부터는 아예 회사 차원에서 직접 토마토 재배와 판매 사업에도 뛰어들었다. “정시에, 정가에, 정량으로 동일한 품질의 토마토를 공급한다”는 게 가고메의 목표다. 가고메가 재배하는 토마토는 가공 전용이기 때문에 다른 토마토 농가들도 농사에 직접 뛰어든 가고메에 별다른 저항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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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메는 현재 일본 전역에서 30개 농장과 토마토 재배 계약을 체결했다. 이 농가들로부터 토마토를 사오는 가격은 1㎏당 298엔(약 3390원)이다. 이 원가는 비가 오든 눈이 오든, 토마토가 풍작이든 흉작이든 변함없다. 덕분에 가고메에 토마토를 납품하는 농가에선 가고메를 믿고 10년 이상의 장기 계약을 맺고 있다.

가고메는 “농업에 대해 아무런 지식이 없어도 농장 일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으로 농장 작업 매뉴얼을 만들어나가고 있다. 직원이 바뀌어도 지속적으로 똑같은 품질의 토마토를 생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이 매뉴얼엔 토마토 재배에 필요한 일조량과 물의 양, 비료 종류 등 각종 정보가 세세하게 담겨 있다.

가고메는 자체 종합연구소도 두고 있다. 이 연구소에선 7500여종의 토마토 종자를 보유하고 있다. 가고메 연구소에선 종자 간 교배를 통해 자사 가공식품에 맞는 토마토 신품종을 개발 중이다.

‘스마트 아그리’를 신성장동력으로

가고메는 최근 ‘식물 공장’(실내에 식물이 자랄 수 있는 조건을 조성해 다양한 작물을 재배·생산하는 건물)을 새로운 투자처로 삼았다. 이른바 ‘스마트 아그리’(smart agriculture의 일본식 표현)다. 스마트 아그리란 농업과 정보통신기술(ICT)을 결합시켜 공정 자동화와 품질 관리 일원화 시스템 등 최첨단 농법을 개발하는 시스템형 공장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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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메는 지난 5월 ‘돔형 식물 공장’을 운영하는 일본 농업 벤처업체 그랜드파에 3억100만엔을 투입, 그랜드파 지분 33.4%를 취득해 2대 주주가 됐다. 돔형 식물 공장은 햇빛이 잘 들어오도록 하는 특수소재를 활용해 반구형 지붕을 만들고, 수경재배로 채소를 기르는 공간이다. 가고메는 “돔형 식물 공장에선 야외 경작지보다 채소가 자라는 속도가 빠르고 품질도 균일하다”며 “그랜드파와 협업해 공장 수를 늘려 수출을 확대하겠다”고 설명했다.

일본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도 최근 가고메가 농업을 확대하는데 한몫했다. 일본 정부는 2009년 ‘헤이세이(아키히토 일왕의 연호) 농지개혁’으로 불리는 농지법 개정을 통해 개인 및 기업체의 농지 임대와 농업 진입을 완전 자율화했다. 이에 따라 2009년 말 436개였던 일본 내 농업 진출 업체 수는 지난해 말 1071개로 급증했다.

아베 정부도 농업을 국가 성장동력을 위한 핵심 전략의 하나로 채택했다. 작년 말 기준 4497억엔인 일본산 농·축·수산물 수출을 2020년까지 1조엔 규모로 키운다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이미아 기자 mi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