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라이프] 신창재 교보생명 회장 "보험의 성패, 계약 아닌 고객확보에 달렸다"
지난달 14일 서울 광화문 네거리 교보생명빌딩 1층 로비에 신창재 교보생명 회장(60)과 몇몇 임직원이 모여들었다. 로비 한 쪽에 자리잡은 ‘고객만족 경영대상 명예의 전당 헌정기념비’를 덮은 가림막을 걷는 조촐한 행사를 위해서였다. 가림막에는 ‘부끄러워 이 기념비를 덮습니다. 명예 회복 후 다시 제막하겠습니다’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2011년 11월 민원 발생이 급증하자 신 회장은 가림막 설치를 지시한 뒤 서비스 업그레이드 과정을 진두지휘했다. 그로부터 1년7개월이 지난 올해 4월 금융감독원의 변액보험 판매 실태 점검에서 교보생명은 생명보험회사 중 유일하게 ‘양호’ 등급을 받았다. 작년 말에는 모든 금융사를 통틀어 펀드 완전판매 평가 1위에 오르기도 했다.

신 회장이 이끄는 교보생명은 절대 강자 삼성생명을 추격하는 2위권 회사다. 하지만 자신만의 색깔이 분명해 업계에서의 존재감은 선두 회사도 부러워할 정도다. 오너 경영의 강점인 ‘멀리 보는 경영’으로 내실있게 보험사를 이끌어가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경영과 관련한 그의 ‘일거수 일투족’은 한결같이 단시일에 성과를 내기보다 장기 결실을 맺는 데 무게를 두고 있다. 처음에는 조직 내부의 삐걱거림도 있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경영 철학이 빛을 보는 사례가 하나씩 쌓이고 있다.

고객은 현미경 읽듯, 경영은 망원경 보듯

교보생명은 작년 9월 ‘즉시연금’ 판매를 전격 중단했다. 올 2월부터 시행 예정이던 비과세 혜택 폐지에 대응해 매달 수천억원의 뭉칫돈이 들어오는 상황에서 신 회장이 내린 결단이었다. 당시 보험사들은 ‘마지막 비과세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며 절판 마케팅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신 회장은 얼핏 꿀단지처럼 보이지만 길게 보면 회사와 고객 모두에 도움이 안 된다며 한 달 만에 판매를 접었다. 심각한 저금리 기조 아래에서 장기적으로 경영에 부담을 줄 수 있다고 판단해서다.

신 회장이 고객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챙기는 것도 ‘멀리 보는 경영 리더십’의 일환이다. “현미경을 들여다보듯 세심하게 고객의 마음을 좇아야 한다”고 직원들에게 주문한다.

그와 경영진이 매달 ‘라포(Rapport)’ 프로그램을 통해 고객을 직접 대면하는 데는 이런 이유가 있다. 상호 신뢰 관계를 뜻하는 심리학 용어인 라포 프로그램은 2004년부터 9년째 이어지고 있다.

신 회장이 요즘 역점을 두는 일은 ‘평생든든 서비스’ (- 보험계약 유지율이 높은 비결)다. 향후 보험업의 성패는 ‘계약 확보’가 아니라 ‘고객 확보’에서 결판난다고 보고 3년째 추진 중이다. 설계사가 보험 가입자들을 지속적으로 방문해 보장내역을 상기시키고 사고나 질병 여부도 확인해 놓친 보험금을 찾아주는 서비스다.

시행 초기에는 ‘새 계약 맺기도 바쁜데 언제 기존 고객을 만나느냐’는 현장의 볼멘소리가 컸다. 신 회장은 “1~2년 하다 그만둘 캠페인이 아니라 고객 중심 영업이 정착할 때까지 평생 추진할 것”이라며 독려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보험 계약의 2년 이상 유지율이 72%로 2년 전보다 10%포인트 넘게 급등했다.

시류에 흔들리지 않는 밸런스 경영

멀리 보고 깊이 읽는 밸런스 경영은 시류에 흔들리지 않는 교보생명의 색깔로 자리잡고 있다. 보험금 지급의 기준이 되는 공시이율 산출 때 대부분 회사는 업계 선두 삼성생명을 따라 하지만 교보는 자신만의 산식을 적용하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변화와 혁신의 길을 고집하는 신 회장의 노력은 뚜렷한 성과로 이어지고 있다. 대표적 수익성 지표인 자기자본이익률(ROE)이 지난해 10.4%로 고공비행 중인 것에서 잘 확인된다. 업계 평균인 6.3%를 크게 웃돌 뿐만 아니라 ‘빅3’ 생보사 가운데서도 9년 내내 1등이다. 그가 업계를 대표하는 최고경영자(CEO)로 지목받는 까닭이다.

신 회장은 작년 10월 아시아태평양 보험 전문가들이 선정한 ‘올해의 아시아 최고 보험경영자’에 뽑혔다. 국내 보험 CEO 중 첫 수상이었다.

오너인 그가 보험전문가로 인정받게 된 것은 겸손한 자세로 끝없이 공부하고 전문가와 함께 보험 원리를 토론한 덕분이다.

업계의 한 고위 관계자는 “10여년 전 취임 초기에 신 회장을 호텔 피트니스센터에서 우연히 마주칠 때가 많았는데 그때마다 몇 시간씩 붙잡고 보험에 대해 묻는 통에 나중에는 일부러 피하기도 했다”며 “그 의지 덕분에 존경받는 오너 CEO로 자리매김했다”고 평가했다.

신용호 교보생명 창업주의 장남인 신 회장은 서울대 의대 교수로 일하다 2000년 마흔일곱의 늦은 나이에 보험사 대표로 변신했다. 외환위기 여파로 회사가 존망의 위기를 넘나들 무렵이었다. ‘영혼을 팔아서라도 회사를 살리겠다’는 절박함으로 당시 위기를 이겨낸 신 회장은 임원들과 만나는 회의실에 세 발 달린 향로 2개 (- 밸런스 경영의 상징) 를 가져다 놓았다. 하나는 균형을 잡아 잘 서 있고, 다른 하나는 세 발의 길이가 달라 넘어질 듯 위태롭게 서 있다. 신 회장이 강조하는 균형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상징물이다. 이해관계자 간 균형, 현재와 미래의 균형, 성장과 리스크 사이의 균형을 따져 의사결정을 해야 한다는 의미다.

백광엽 기자 kecore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