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들어 5조원어치 팔아 '자금수혈'
'국내기업 쇼핑'은 20분의 1로 급감
자금 여유 대기업은 해외로 눈돌려
▶마켓인사이트 7월9일 오전 5시49분 국내 대기업들이 올해 상반기 5조원에 이르는 자산을 팔아치운 것으로 집계됐다.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세 배 이상 급증했다. 조선 건설 해운 등 주력 산업부문에서 좀처럼 경기가 살아날 기미를 보이지 않자 돈 되는 계열사나 부동산을 팔며 허리띠를 조였다.
반면 국내 투자에는 사실상 손을 놓았다. 작년 상반기 국내 인수합병(M&A) 시장에서 8조1499억원을 풀어 기업 ‘쇼핑’에 나선 것과 달리 올해 같은 기간에는 20분의 1가량인 4872억원을 쓰는 데 그쳤다.
지난해 CJ대한통운 등 수조원대 매물을 놓고 벌어진 대기업 간 인수 경쟁은 올 들어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경제민주화 바람 속에서 논란이 될 만한 국내 사업 확장을 꺼린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업황 악화, 돈 되는 것부터 판다
10일 한국경제신문과 에프앤가이드가 올해 상반기 마무리된 국내 M&A 관련 딜(비 경영권, 부동산 거래 포함, 계열사 간 거래 제외)을 분석한 결과 대기업(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 62곳)이 자산을 매각한 사례는 24건 4조8459억원어치에 달했다. 지난해 상반기의 1조4981억원(16건)과 비교하면 무려 320% 늘었다.
특히 올해는 유난히 핵심 계열사의 지분을 파는 사례가 줄을 이었다. 지난해는 사업 구조조정 차원의 ‘선택적 정리’였다면 올해는 유동성을 개선하기 위한 ‘불가피한 매각’이 많았다.
LIG그룹은 LIG건설 부진에 따른 재무 부담을 덜기 위해 LIG넥스원 지분 49%를 팔았고 STX그룹은 특수선 건조회사인 STX OSV 홀딩스 지분 50.75%와 경영권을 내놨다. 법정관리에 들어간 웅진그룹은 코웨이와 패스원을 각각 사모펀드(PEF)에 매각했다.
어려움에 빠진 기업들은 핵심 부동산도 팔아야 했다. GS건설과 두산건설 등은 부동산 경기 침체를 견디지 못하고 본사 건물을 매각했고 대성산업가스는 지난 5월 서울 신도림동 디큐브시티 오피스를 부동산펀드에 넘겼다. 유통업체들도 잇달아 주요 매장 건물을 세일앤드리스백(매각 후 재임대) 방식으로 다른 투자자에게 팔아 현금을 확보했다.
사업 구조조정 차원에서 비핵심 사업부나 계열사를 매각하는 사례도 이어졌다. SK플래닛은 적자를 이어가던 자회사 팍스넷의 지분을 털어냈으며 호텔신라는 외식사업 철수를 위해 레스토랑 체인인 탑클라우드코퍼레이션을 정리했다.
◆국내 기업 인수 크게 줄어
지난해 고조됐던 대기업들의 인수 열풍은 올해 크게 사그라졌다. 대기업들은 지난해 상반기에만 25건 8조1499억원어치의 매물을 사들였다. 하지만 올해 같은 기간에는 5건 4872억원으로 줄었다.
지난해에는 딜 한 건에 1000억원 이상 쓴 경우만 10건에 이른다. SK와 CJ그룹은 각각 SK하이닉스와 대한통운을 조원대에 인수했다. CS유통(인수기업 롯데쇼핑) 삼성에버랜드 지분(KCC) 에스엠(이마트) 한섬(현대백화점) 비씨카드(KT캐피탈) 녹십자생명보험(기아차) 대한은박지(동원엔터프라이즈) 반얀트리클럽앤스파(현대그룹) 등도 1000억원을 웃도는 가격에 팔렸다.
올해는 동부그룹이 3500억원을 들여 대우일렉트로닉스를 인수한 것을 제외하면 1000억원 이상 가격에 사들인 사례가 없다. 동부를 제외한 나머지 대기업은 올해 국내에서 신규 M&A를 중단한 셈이다.
◆쌓아놓은 실탄은 해외에서 쏜다
대기업들은 국내에선 움츠리면서도 해외에서는 공격적으로 매물 사냥에 나섰다. 상반기 해외 자산 인수 규모는 2조3691억원에 달했다. 작년 같은 기간 1조5113억원에 비해 56% 증가했다.
특히 소매 유통 엔터테인먼트 등 내수 중심 업종의 글로벌 시장 진출 의지가 강했다. 롯데칠성은 필리핀 펩시콜라 제조업체인 PCPPI 지분 34.4%를 사들여 최대주주가 됐다. 이랜드는 미국 스포츠 브랜드인 K·SWISS(케이스위스)를, LG생활건강은 일본 건강식품 통신판매업체 에버라이프를 인수해 계열사로 편입했다. CJ게임즈는 터키 1위 게임 퍼블리싱 업체인 조이게임에 전략적 투자를 했다.
삼성전자도 올 상반기 국내외에서 다양한 딜에 참여하며 신사업을 모색했다. 올초 미국 바이오 회사 한 곳을 인수한 데 이어 3월엔 일본 샤프에 1200억원가량을 투자했고 5월에는 팬택 주식 530억원어치를 샀다. 한편으론 필리핀 광디스크드라이브(ODD) 생산법인을 팔았다.
고경봉 기자 kg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