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일본에 강제 징용돼 고된 노역을 하고도 임금을 받지 못한 피해자들에게 일본 업체가 손해를 배상하라는 첫 판결이 나왔다. 이는 일본 법원의 판결을 정면으로 뒤집은 것으로, 비슷한 상황에 처했던 다른 강제 징용 피해자들의 줄소송이 잇따를 전망이다.

◆“반인도적 불법 행위…1억원 지급”


서울고법 민사19부(부장판사 윤성근)는 10일 여모씨(90) 등 4명이 신일철주금(옛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의 파기환송심에서 원고 일부 승소로 판결하고 원고들에게 각 1억원과 지연손해금을 지급할 것을 명령했다. 2005년 소송을 제기한 피해자들은 8년 만에 배상금을 받게 됐다. 일부 피해자가 1997년 일본 오사카지방재판소에 소송을 냈다가 패소했던 것을 감안하면 16년 만에 승소했다.

재판부는 “일본의 핵심 군수업체였던 옛 신일본제철은 침략 전쟁을 위해 인력을 동원하는 등 반인도적인 불법 행위를 저질렀다”며 “이는 국제 질서와 대한민국 헌법뿐 아니라 현재 일본 헌법에도 반하는 행위”라고 밝혔다. 이어 “50년이 넘는 기간 중 책임을 부정한 피고의 태도와 현재 국민소득, 통화가치 등을 고려해 배상금을 산정했다”고 덧붙였다.

원고를 대리한 김미경 법무법인 해마루 변호사는 “역사적인 판결”이라며 “피고 신일본제철이 배상을 임의로 집행해주길 바라고 그렇지 않을 경우 강제집행 절차를 고려할 것”이라고 말했다.

여씨 등 4명은 1941~1943년 옛 신일본제철의 모집 광고를 보고 오사카제철소에 훈련공으로 일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당시 모집 담당관은 충분한 식사와 임금을 보장하고 기술을 배워 귀국 후 한국에서 기술자로 취직할 수 있다고 회유했다. 실제로는 월 1~2회 정도 외출만 허락되고 구타를 당하는 등 단순 노역에 시달렸고 임금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여씨와 신모씨(87)는 1997년 말 일본 오사카지방재판소에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냈으나 패소했고 이후 2003년 최고재판소에서 이 판결이 확정됐다. 여씨 등 4명은 이후 1인당 1억원의 위자료를 달라며 국내 법원에 소송을 냈다. 1심과 2심은 “일본의 확정 판결은 우리나라에서도 효력이 인정된다”며 패소 판결했으나 대법원은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줄소송 잇따를 듯…배상 집행은 과제

이번 판결은 다른 강제 징용 피해자들이 낸 비슷한 소송에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지난 2월 군수업체 후지코시에서 강제 노역을 당한 피해자 13명과 유족 18명은 이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부산고법은 강제 징용 피해자 4명과 유족 1명이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의 파기환송심에 대해 오는 30일 선고를 내릴 예정이다.

하지만 손해 배상 판결이 나오더라도 배상금을 받아내는 것은 또 다른 과제라는 게 법조계의 지적이다. 해당 업체가 국내에 해당 금액만큼의 자산이 있다면 법원은 이를 압류해 강제 집행할 수 있다. 신일본제철은 포스코 지분 5%를 보유한 것으로 알려져 이를 법원이 압류할 수 있다. 하지만 국내 자산이 없는 다른 기업의 경우 일본 법원에 판결 수용을 따로 신청해야 한다. 법원 관계자는 “이번 판결이 일본 법원의 선고를 정면으로 뒤집는 것이어서 이를 수용할 가능성은 낮은 편”이라고 말했다.

신일철주금 측은 “징용자 등 문제를 최종적으로 해결한 1965년 일·한청구권협정을 부정하는 부당한 판결이어서 진정으로 유감”이라며 “신속히 대법원에 상고할 것”이라고 밝혔다.

정소람 기자 ra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