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골프의 전설' 그린서 잠들다…구옥희 前 KLPGA 회장 日골프장서 심장마비로 별세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캐디로 골프와 인연 맺어
국내 20승·日무대서 23승…美LPGA 한국인 첫 우승
국내 20승·日무대서 23승…美LPGA 한국인 첫 우승
한국여자골프의 1세대 선수이자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KLPGA) 회장을 지낸 구옥희 씨가 지난 10일 오후 일본 시즈오카현에서 심장마비로 숨졌다. 향년 57세.
KLPGA는 “구 전 회장이 시즈오카현의 한 골프장 숙소에서 심장마비로 숨진 것으로 확인됐다”며 “국내로 운구되는 대로 장례 일정을 결정하겠다”고 11일 밝혔다. 고인은 지난 4월 훈련과 휴식을 겸해 프로골퍼인 조카 구현진 등과 함께 일본으로 떠났다. 최근까지 연습 라운딩을 해왔지만 숨진 당일에는 몸이 좋지 않아 골프를 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KLPGA 관계자는 “조카 구씨가 라운드를 마치고 숙소해 도착했을 때 고인은 숨을 쉬기 어려운 위독한 상황이었다”며 “병원으로 이송했으나 운명을 달리했다”고 전했다. 고인은 저혈압 증세로 평소 건강관리에 신경을 써온 것으로 알려졌다.
고인은 어릴 때 부모를 잃은 뒤 생활고로 1975년 경기 고양시의 한 골프장에서 캐디로 일하게 되면서 골프와 인연을 맺었다. 혼자 골프를 배운 그는 특출한 재능을 보여 주위로부터 프로에 도전해 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당시 한국프로골프협회(KPGA)는 여자 골프 활성화를 위해 협회 내 여자부를 신설했고 1978년 한국골프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을 대상으로 프로테스트를 실시했다. 1978년 5월 첫 여자 프로테스트를 통과한 그는 강춘자 안종현 한명현 등과 함께 프로선수가 됐다. 회원번호는 3번.
초창기 여자프로골프대회는 1년에 몇 차례밖에 열리지 않았다. 1978년에는 KLPGA 선수권대회 1개만 개최됐고, 이후 10년 동안 시즌당 대회 수는 5~7개에 불과했다. 1978년 9월 처음 열린 여자프로골프대회인 KLPGA 선수권에서 준우승한 고인은 1979년 쾌남오픈에서 첫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1980년 KLPGA 5개 대회에서 모두 우승하며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1981년에도 4승을 거두는 등 승승장구했다. 국내 투어에서 통산 20승을 기록한 그는 국내에서는 적수가 없는 1인자로 군림했다.
고인은 해외 진출의 첫 테이프를 끊은 주인공이기도 했다. 그는 재일동포의 권유로 1983년 일본여자프로골프(JLPGA) 투어 프로테스트를 통과했다. 1985년 기분 레이디스에서 첫승을 거둔 뒤 2005년까지 일본 투어에서만 통산 23승을 올렸다.
미국 무대에도 진출했다. 1988년 3월 미국 LPGA투어 스탠더드 레지스터 터콰이 클래식에서 우승하며 한국인 우승자 1호 기록을 남겼다. 고인은 당시 “내 우승 소식조차 알려지지 않아 섭섭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는 국내외에서 한국 골프의 위상을 높인 공로를 인정받아 2004년 KLPGA투어 명예의 전당에 1호로 입회했다. 1994~2010년 KLPGA 부회장직을 맡았고, 2011년부터 지난해 3월까지 KLPGA 제11대 회장으로 일했다. 고인은 평생을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지냈다.
이날 고인의 부음을 접한 후배 골퍼 고우순은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며 “지난해 12월 선배님과 마지막으로 통화했을 때도 ‘훈련 나간다’고 하셨을 만큼 건강했다”고 전했다. 그는 “한국 선수들이 LPGA에서 통산 100승을 거둔 것도 구 선배가 길을 열어준 덕분”이라며 고인의 죽음을 애통해했다.
서기열 기자 philos@hankyung.com
KLPGA는 “구 전 회장이 시즈오카현의 한 골프장 숙소에서 심장마비로 숨진 것으로 확인됐다”며 “국내로 운구되는 대로 장례 일정을 결정하겠다”고 11일 밝혔다. 고인은 지난 4월 훈련과 휴식을 겸해 프로골퍼인 조카 구현진 등과 함께 일본으로 떠났다. 최근까지 연습 라운딩을 해왔지만 숨진 당일에는 몸이 좋지 않아 골프를 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KLPGA 관계자는 “조카 구씨가 라운드를 마치고 숙소해 도착했을 때 고인은 숨을 쉬기 어려운 위독한 상황이었다”며 “병원으로 이송했으나 운명을 달리했다”고 전했다. 고인은 저혈압 증세로 평소 건강관리에 신경을 써온 것으로 알려졌다.
고인은 어릴 때 부모를 잃은 뒤 생활고로 1975년 경기 고양시의 한 골프장에서 캐디로 일하게 되면서 골프와 인연을 맺었다. 혼자 골프를 배운 그는 특출한 재능을 보여 주위로부터 프로에 도전해 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당시 한국프로골프협회(KPGA)는 여자 골프 활성화를 위해 협회 내 여자부를 신설했고 1978년 한국골프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을 대상으로 프로테스트를 실시했다. 1978년 5월 첫 여자 프로테스트를 통과한 그는 강춘자 안종현 한명현 등과 함께 프로선수가 됐다. 회원번호는 3번.
초창기 여자프로골프대회는 1년에 몇 차례밖에 열리지 않았다. 1978년에는 KLPGA 선수권대회 1개만 개최됐고, 이후 10년 동안 시즌당 대회 수는 5~7개에 불과했다. 1978년 9월 처음 열린 여자프로골프대회인 KLPGA 선수권에서 준우승한 고인은 1979년 쾌남오픈에서 첫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1980년 KLPGA 5개 대회에서 모두 우승하며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1981년에도 4승을 거두는 등 승승장구했다. 국내 투어에서 통산 20승을 기록한 그는 국내에서는 적수가 없는 1인자로 군림했다.
고인은 해외 진출의 첫 테이프를 끊은 주인공이기도 했다. 그는 재일동포의 권유로 1983년 일본여자프로골프(JLPGA) 투어 프로테스트를 통과했다. 1985년 기분 레이디스에서 첫승을 거둔 뒤 2005년까지 일본 투어에서만 통산 23승을 올렸다.
미국 무대에도 진출했다. 1988년 3월 미국 LPGA투어 스탠더드 레지스터 터콰이 클래식에서 우승하며 한국인 우승자 1호 기록을 남겼다. 고인은 당시 “내 우승 소식조차 알려지지 않아 섭섭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는 국내외에서 한국 골프의 위상을 높인 공로를 인정받아 2004년 KLPGA투어 명예의 전당에 1호로 입회했다. 1994~2010년 KLPGA 부회장직을 맡았고, 2011년부터 지난해 3월까지 KLPGA 제11대 회장으로 일했다. 고인은 평생을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지냈다.
이날 고인의 부음을 접한 후배 골퍼 고우순은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며 “지난해 12월 선배님과 마지막으로 통화했을 때도 ‘훈련 나간다’고 하셨을 만큼 건강했다”고 전했다. 그는 “한국 선수들이 LPGA에서 통산 100승을 거둔 것도 구 선배가 길을 열어준 덕분”이라며 고인의 죽음을 애통해했다.
서기열 기자 phil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