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동 대법원에서 12일 열린 고엽제 피해자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패소 취지의 판결이 나온 뒤 고엽제 전우회 회원들이 착잡한 표정을 짓고 있다. 연합뉴스
서울 서초동 대법원에서 12일 열린 고엽제 피해자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패소 취지의 판결이 나온 뒤 고엽제 전우회 회원들이 착잡한 표정을 짓고 있다. 연합뉴스
월남전 파병 장병 약 32만명 중 1만6579명이 다우케미컬·몬산토 등 미국 고엽제 제조업체 두 곳을 상대로 제기한 제조물책임 상고심 소송에서 39명이 염소성 여드름 질병에 대해 손해배상 판결을 받았다. 고엽제 제조회사의 책임이 법원에서 일부라도 인정돼 확정된 것은 세계적으로 이번이 처음이다. 2심에서는 6795명이 손해배상 판결을 받았지만 대법원 3부(주심 이인복 대법관)는 12일 “39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고엽제와 질병 간에 인과관계가 인정되지 않는다”며 원고 패소 취지로 서울고등법원에 파기환송했다. 1999년 국내에서 제기된 고엽제 소송은 이로써 14년 만에 일단락됐다.

◆고엽제 제조사 책임, 첫 인정

이번 재판의 쟁점은 △고엽제에 설계상 결함이 있는지 △파병 장병들의 질병과 고엽제 노출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는지 △한국 법원에 재판 관할권이 있는지 여부 등 세 가지다.

대법원은 제조물인 고엽제에 설계상 결함이 있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고엽제에 포함된 다이옥신 성분(TCDD)이 인체에 미칠 유해성에 관해 충분히 조사·연구하고 고도의 위험 방지 조치를 제대로 취하지 않은 잘못이 있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파월 장병들의 질병과 고엽제 노출 사이의 인과관계는 대부분 인정하지 않았다. 다만 염소성 여드름은 “고엽제에 함유된 다이옥신 성분 말고 다른 원인에 의해서는 발병되지 않는 특이성 질환”이라며 인과관계를 인정했다.

당뇨병과 폐암 등 각종 암, 호지킨병, 다발성 골수종 등의 질병은 “유전·체질 등 선천적 요인과 흡연, 연령 등 후천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발생하는 비특이성 질환”이라며 인과관계를 부인했다. 파월 장병의 2세들에게 말초신경병이 발병했다는 주장도 증거 부족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염소성 여드름 환자 중에서도 손해배상을 받게 된 원고는 39명뿐이다. 배상금액은 1인당 600만~1400만원, 총 4억6600만원이다.

재판을 열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하는 ‘재판관할권’과 관련, 대법원은 “피해자가 한국 참전 군인들이며, 손해 발생 장소도 한국”이라며 한국 법원에 국제재판관할권이 있고 준거법도 한국법이라고 판단했다.

39명이 미국 회사로부터 손해배상을 받으려면 별도의 사법 절차를 밟아야 한다. 대법원 관계자는 “미국에서 다시 집행 소송을 제기해야 하지만 이미 피고 회사의 국내 특허권을 압류한 것이 있다”고 설명했다.

◆“딱한 사정만으로 판결할 수 없어”

재판장인 김신 대법관은 이날 판결문을 읽기 전 “오랜 기간 치열하게 변론해온 쌍방 당사자에게 경의를 표한다”면서도 “고엽제 피해자들의 딱한 사정만으로 판결할 수는 없었다”고 안타까운 심정을 드러냈다.

김성욱 대한민국고엽제전우회 사무총장은 판결 선고 직후 “대법원이 사건을 7년 동안이나 방치한 것이 오늘 선고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싶다”며 “우리 (사법) 주권을 포기했다고 생각한다”고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대부분의 전우회 회원들은 별다른 반응 없이 법정을 나섰다.

‘베트남 고엽제피해자 전우회’는 1994년 미국 캘리포니아 북부연방법원에 처음 소송을 제기했다. 1999년 각하 판결을 받자 국내 법원에서 소송을 시작했다. 2002년 5월 서울지법은 증거 불충분 등을 이유로 원고 패소 판결했지만 2006년 1월 서울고법은 비호지킨 림프샘암과 후두암 등 11개 질병에 대해 고엽제와의 역학적 인과관계를 인정, 6795명에게 630억여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김병일 기자 kb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