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아, 영도다리
‘남한으로 갈라문 맨 끝탱이에 부산이란 데가 있다더라만, 살라문 거기로 가야 한다는 기야. 기라구, 거기에 가문 말야. 무신 다리가 있는데, 기린데, 그 다리가 하루에 두 번씩 벌커덕, 든다는 거야.’

윤진상 소설 ‘영도다리’의 주인공 부부가 훗날을 기약하며 하는 말이다. 이들의 애틋한 약속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지만, 6·25 때 피란민들은 너나없이 “헤어지면 부산 영도다리에서 만나자”고 했다.

왜 하필 영도다리였을까. 부산은 임시수도가 있는 최후의 보루였고, 영도다리는 배가 지나갈 때마다 상판 한 쪽을 들어올리는 명물로 전국에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생이별한 이산가족들이 재회하고 또 절망하며 서로를 부둥켜 안았던 현대사의 현장이 됐다.

가수 현인의 ‘굳세어라 금순아’가 전 국민을 울린 이유도 마찬가지다. 이 노래에서 ‘일가 친척 없는 몸’이 외로이 뜬 초승달을 바라보는 곳 뿐만 아니라 ‘함경도 사나이’ ‘추억의 영도다리’ 등 20곡이 넘는 영도다리 노래에는 하나같이 ‘난간’이 등장한다. 고달픈 삶에 지쳐 희망줄을 놓아버린 사람들과 전쟁통에 가족을 다 잃은 사람들이 차가운 바다 속으로 몸을 던졌던 눈물의 난간. 살아남은 사람들도 고단하기 짝이 없었다. 봉래산 언덕배기 ‘하꼬방’에서 밤새 깡통지붕을 만들던 노인, 탈색 바지에 러닝셔츠 바람으로 구제품을 팔러 다니던 중년 남자, 헐벗은 피란 청년에게 외상밥을 먹여주던 자갈치 아줌마….

‘북간도’의 작가 안수길은 손때 묻은 가방을 들고 영도다리를 지나 남포동 ‘자유세계’ 편집실로 시인 김수영과 김종삼 등을 만나러 다녔다. 그가 피란생활을 그린 단편 ‘제3인간형’에는 영도에서 자줏빛 안개에 휩싸인 대마도를 보는 장면이 묘사돼 있다. 시인 김광균은 ‘부두엔 등불이 밝고/ 외국상선들 때맞춰 꽃고동을 울려도/ 손목잡고 밤샐 친구 하나도 없이/ (중략) /영도다리 난간 이슬에 젖도록/혼자 서서 중얼거리니/ 먼 훗날 누가 날 이곳에서 만났다 할까.’(시 ‘영도다리’)라고 읊었다.

이렇듯 수많은 사연을 간직한 영도다리는 1934년 완공 후 상수도관 설치와 교통난 때문에 상판 들어올리기를 멈춘 1966년까지 하루 7차례 사이렌을 울리며 오르락내리락했다. 이 다리가 47년 만에 다시 상판을 들어올렸다. 복원 공사가 완전히 끝나는 11월엔 정식 개통한다고 한다. 오랜 세월 ‘만남의 다리’이자 ‘이별의 다리’였던 역사적 명물이 되살아나는 걸 보니 뭉클하다. 그러고 보니 한때 외국 선원들이 판자촌 불빛을 보고 ‘전쟁 난 줄 알았는데 저렇게 큰 빌딩숲이 있다니…원더풀’ 했다던 영도 언덕배기에도 이젠 현대식 건물이 즐비하고….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