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 60년, 기적의 60년] 이영훈 교수 "비극적 전쟁서 깨우친 자유민주주의, 경제 번영 토대 일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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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경제 戰後 60년 이영훈 서울대 교수에게 듣는다
경제 기적 주역은 기업가
"수출해야 먹고 산다" 절감…정부에 성장전략 제시
정치적 리더십 있었기에…
엘리트 관료 전면 동원…민관 협력시스템 만들어
경제 기적 주역은 기업가
"수출해야 먹고 산다" 절감…정부에 성장전략 제시
정치적 리더십 있었기에…
엘리트 관료 전면 동원…민관 협력시스템 만들어
“지금까지 쓰이고 가르쳐진 대한민국의 역사는 이 나라가 세워지고 발전해온 역사를 정당하게 평가하지 않은 탓에 오히려 국민을 분열시켰다.”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는 “전후(戰後) 한국이 이룬 경제적 번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분단 이후 한국 역사에 대해 제대로 된 이해가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경제사학자로 서울대 경제연구소장을 맡고 있는 이 교수는 최근 ‘대한민국 역사: 나라 만들기 발자취 1945~1987’(기파랑)을 출간했다. 2008년 좌파 한국사 교과서에 맞서 출간한 ‘대안 교과서 한국 근·현대사’의 미진했던 서술을 보강한 본격 연구서다. 정전 60주년을 맞아 한국 현대사를 새롭게 해석한 책을 출간한 이 교수를 지난 25일 서울대 연구실에서 만났다.
▷5년 전 펴낸 책을 보완해 출간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한국이라는 국가의 탄생 과정을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의 역사는 깊은 내면의 분열을 안고 있습니다. 이런 상태를 내버려둔다면 아마 대한민국은 선진국이 될 수 없을 겁니다. 대한민국 국민이 자랑스럽게 공유할 수 있는 통합의 역사를 새롭게 쓰고자 했습니다.”
▷6·25전쟁이 전후 경제재건 과정에 어떤 영향을 미쳤다고 봅니까.
“전쟁의 비극은 한국인으로 하여금 대한민국의 국민임을 자각하고 국가에 대한 애국심을 갖게 하는 계기로 작용했습니다. 전쟁을 거치면서 국민의 국가에 대한 귀속의식과 애국심이 강화됐습니다. 북한군의 피점령 체험은 자유민주주의를 위한 둘도 없는 교육기간이었습니다. 대다수의 남한 국민에게 대한민국은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북의 공산체제보다 훨씬 나은 국가였습니다.”
▷전후 정부가 취한 경제정책의 방향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1950년대 초반 미국 원조에 기대 근근이 체제를 유지하면서도 정부는 산업의 기틀을 닦기 시작했습니다. 이승만 정부는 비료와 면방직, 철강 등 기초공업에 투자했습니다. 의무교육을 통해 인적자원도 육성했고요. 1960년대의 경제개발계획 성공은 1950년대 뿌린 씨앗이 돌아온 겁니다. 역사학자들은 1950년대 경제정책을 재평가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국내에는 변변한 시장도 없을 때였습니다.
“다행히 1960년대부터 새로운 시장이 열렸습니다. 고도성장하고 있던 선진국이 노동집약적인 경공업 제품 생산을 후진국에 맡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때 한국의 면방직, 합판, 철강 등의 수출이 크게 늘면서 경제성장의 첫 번째 기회를 잡았습니다.”
▷수출 주도형 성장전략은 어떻게 탄생하게 됐나요.
“기업가의 역할이 컸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경제개발 욕구가 투철했지만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체계 없이 의욕만으로 세워져 엉성하기 짝이 없거든요. 하지만 시장의 변화를 가장 긴밀하게 파악한 사람이 기업가들이었습니다. 수출을 해야 먹고살 수 있다는 걸 피부로 느낀 거죠. 이런 기업가들의 살아 있는 아이디어가 박 전 대통령에게 통했습니다. 국가가 기업의 수출을 지원하는 체제를 만든 겁니다.”
▷민관합동체라는 한국 특유의 성장 경로가 탄생했군요.
“그렇습니다. 당시 한국과 상황이 비슷했던 다른 국가들엔 한국에 있는 정치적 리더십이 없었습니다. 발전국가 체제를 지속적으로 유지시킬 수 있는 관료제도 아직 자리잡히지 않았고요. 하지만 한국은 엘리트 관료를 전면 동원해 민간과 협력하는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자원 배분의 왜곡이 생겼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선별된 소수에 대한 특혜적 지원이 오늘날의 경제를 일군 건 사실입니다. 당시에도 비슷한 비판이 있었습니다. 수출 중심 대기업을 키울 게 아니라 철강 등 주요 산업을 국영화하고 중소기업과 농업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얘기가 나왔어요. 그러나 지금 돌아보면 그런 발전 경로를 취했던 여러 나라는 모두 실패했습니다. 반면 한국이 택한 국제시장 개방정책은 기업들로 하여금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게 했죠.”
▷민주주의의 희생은 경제성장의 대가였을까요.
“1970년대까지의 한국은 민주주의가 작동할 수 있는 객관적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습니다. 대신 카리스마적 리더십에 의존하는 권위주의 정치문화가 자리잡혀 있었죠. 대중은 거기에 자발적으로 동원됐습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직선제 개헌도 정치적으로는 무리한 선택이었지만 국민 다수는 지지했던 것처럼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말씀인가요.
“자기판단을 할 수 있는 중산층이 형성된 오늘날이라면 불가능한 일이었겠지만, 당시엔 그랬습니다. 권위주의적 정치에 부정적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시민층이 생겨난 건 1980년대 들어서입니다. 물질적인 경제성장 후에야 민주주의의 가치를 받아들일 수 있는 중산층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최근 한국 경제는 한계에 부딪혔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한국은 구조적인 저성장시대에 돌입했습니다. 문제가 있다고 해서 과거 개발국가시대로 돌아갈 순 없지 않겠습니까. 답은 전면적인 경제 개방화라고 봅니다. 한국 경제의 발전사를 돌아보면 기회는 항상 개방에 있었습니다. 첫 경제 발전의 계기가 된 경공업 수출 중심의 ‘주어진’ 비교우위가 그랬죠. 이후 중화학기업 육성으로 이어진 동태적 비교우위도 경제개방을 모색하다가 나왔습니다. 이제 제3의 개방이 필요합니다. 경제 발목을 잡고 있는 온갖 규제부터 혁파해야 합니다. 전면적인 개방화·자유화에 맞는 새로운 국민윤리도 필요하고요. 새로운 혁신개방정책이 한국 경제의 새 길을 뚫어줄 겁니다.”
대담=이심기 경제부 차장/정리=고은이 기자 koko@hankyung.com
이영훈 교수는 한국의 대표적인 경제사학자다. 조선후기 실학사상과 일제강점기 경제발전사의 권위자로 평가받고 있다. 한국고문서학회장과 경제사학회장을 역임했고, 서울대 경제연구소장, 낙성대경제연구소 이사장, 다산학술문화재단 이사를 맡고 있다.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는 “전후(戰後) 한국이 이룬 경제적 번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분단 이후 한국 역사에 대해 제대로 된 이해가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경제사학자로 서울대 경제연구소장을 맡고 있는 이 교수는 최근 ‘대한민국 역사: 나라 만들기 발자취 1945~1987’(기파랑)을 출간했다. 2008년 좌파 한국사 교과서에 맞서 출간한 ‘대안 교과서 한국 근·현대사’의 미진했던 서술을 보강한 본격 연구서다. 정전 60주년을 맞아 한국 현대사를 새롭게 해석한 책을 출간한 이 교수를 지난 25일 서울대 연구실에서 만났다.
▷5년 전 펴낸 책을 보완해 출간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한국이라는 국가의 탄생 과정을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의 역사는 깊은 내면의 분열을 안고 있습니다. 이런 상태를 내버려둔다면 아마 대한민국은 선진국이 될 수 없을 겁니다. 대한민국 국민이 자랑스럽게 공유할 수 있는 통합의 역사를 새롭게 쓰고자 했습니다.”
▷6·25전쟁이 전후 경제재건 과정에 어떤 영향을 미쳤다고 봅니까.
“전쟁의 비극은 한국인으로 하여금 대한민국의 국민임을 자각하고 국가에 대한 애국심을 갖게 하는 계기로 작용했습니다. 전쟁을 거치면서 국민의 국가에 대한 귀속의식과 애국심이 강화됐습니다. 북한군의 피점령 체험은 자유민주주의를 위한 둘도 없는 교육기간이었습니다. 대다수의 남한 국민에게 대한민국은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북의 공산체제보다 훨씬 나은 국가였습니다.”
▷전후 정부가 취한 경제정책의 방향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1950년대 초반 미국 원조에 기대 근근이 체제를 유지하면서도 정부는 산업의 기틀을 닦기 시작했습니다. 이승만 정부는 비료와 면방직, 철강 등 기초공업에 투자했습니다. 의무교육을 통해 인적자원도 육성했고요. 1960년대의 경제개발계획 성공은 1950년대 뿌린 씨앗이 돌아온 겁니다. 역사학자들은 1950년대 경제정책을 재평가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국내에는 변변한 시장도 없을 때였습니다.
“다행히 1960년대부터 새로운 시장이 열렸습니다. 고도성장하고 있던 선진국이 노동집약적인 경공업 제품 생산을 후진국에 맡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때 한국의 면방직, 합판, 철강 등의 수출이 크게 늘면서 경제성장의 첫 번째 기회를 잡았습니다.”
▷수출 주도형 성장전략은 어떻게 탄생하게 됐나요.
“기업가의 역할이 컸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경제개발 욕구가 투철했지만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체계 없이 의욕만으로 세워져 엉성하기 짝이 없거든요. 하지만 시장의 변화를 가장 긴밀하게 파악한 사람이 기업가들이었습니다. 수출을 해야 먹고살 수 있다는 걸 피부로 느낀 거죠. 이런 기업가들의 살아 있는 아이디어가 박 전 대통령에게 통했습니다. 국가가 기업의 수출을 지원하는 체제를 만든 겁니다.”
▷민관합동체라는 한국 특유의 성장 경로가 탄생했군요.
“그렇습니다. 당시 한국과 상황이 비슷했던 다른 국가들엔 한국에 있는 정치적 리더십이 없었습니다. 발전국가 체제를 지속적으로 유지시킬 수 있는 관료제도 아직 자리잡히지 않았고요. 하지만 한국은 엘리트 관료를 전면 동원해 민간과 협력하는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자원 배분의 왜곡이 생겼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선별된 소수에 대한 특혜적 지원이 오늘날의 경제를 일군 건 사실입니다. 당시에도 비슷한 비판이 있었습니다. 수출 중심 대기업을 키울 게 아니라 철강 등 주요 산업을 국영화하고 중소기업과 농업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얘기가 나왔어요. 그러나 지금 돌아보면 그런 발전 경로를 취했던 여러 나라는 모두 실패했습니다. 반면 한국이 택한 국제시장 개방정책은 기업들로 하여금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게 했죠.”
▷민주주의의 희생은 경제성장의 대가였을까요.
“1970년대까지의 한국은 민주주의가 작동할 수 있는 객관적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습니다. 대신 카리스마적 리더십에 의존하는 권위주의 정치문화가 자리잡혀 있었죠. 대중은 거기에 자발적으로 동원됐습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직선제 개헌도 정치적으로는 무리한 선택이었지만 국민 다수는 지지했던 것처럼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말씀인가요.
“자기판단을 할 수 있는 중산층이 형성된 오늘날이라면 불가능한 일이었겠지만, 당시엔 그랬습니다. 권위주의적 정치에 부정적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시민층이 생겨난 건 1980년대 들어서입니다. 물질적인 경제성장 후에야 민주주의의 가치를 받아들일 수 있는 중산층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최근 한국 경제는 한계에 부딪혔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한국은 구조적인 저성장시대에 돌입했습니다. 문제가 있다고 해서 과거 개발국가시대로 돌아갈 순 없지 않겠습니까. 답은 전면적인 경제 개방화라고 봅니다. 한국 경제의 발전사를 돌아보면 기회는 항상 개방에 있었습니다. 첫 경제 발전의 계기가 된 경공업 수출 중심의 ‘주어진’ 비교우위가 그랬죠. 이후 중화학기업 육성으로 이어진 동태적 비교우위도 경제개방을 모색하다가 나왔습니다. 이제 제3의 개방이 필요합니다. 경제 발목을 잡고 있는 온갖 규제부터 혁파해야 합니다. 전면적인 개방화·자유화에 맞는 새로운 국민윤리도 필요하고요. 새로운 혁신개방정책이 한국 경제의 새 길을 뚫어줄 겁니다.”
대담=이심기 경제부 차장/정리=고은이 기자 koko@hankyung.com
이영훈 교수는 한국의 대표적인 경제사학자다. 조선후기 실학사상과 일제강점기 경제발전사의 권위자로 평가받고 있다. 한국고문서학회장과 경제사학회장을 역임했고, 서울대 경제연구소장, 낙성대경제연구소 이사장, 다산학술문화재단 이사를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