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뺨치는 서류로 윽박…보험사도 '쩔쩔'
보험사 보상 담당부서에서 일하는 이모씨(41)는 이달 중순 한 장의 민원 서류를 보고 깜짝 놀랐다. 교통사고로 발목 뼈를 다친 40대 남성이 보험금 액수에 불만을 제기한 민원이었는데, 상해보험의 장해등급 구분에서부터 의학용어까지 보험 전문가 뺨치는 수준으로 잘 정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며칠 후 이씨는 또 다른 민원 서류를 받아 보고 다시 한 번 놀랐다. 허리디스크 수술에 대한 후유장해 보험금 지급을 요구하는 민원이었는데, 역시 수준급이었다. 어찌된 일인지 알아 보니 이들 민원은 모두 손해사정사가 브로커 역할을 맡아 대신 작성해 제출한 것이었다.

지난 3월 취임한 최수현 금융감독원장이 금융소비자 보호를 강조하고 민원 감축을 중점과제로 추진하자 ‘민원 브로커’가 활개치는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 상습적으로 악성 민원을 제기하는 ‘블랙 컨슈머’ 차원을 넘어 “보험금을 더 받아주겠다”며 소비자를 부추기는 ‘브로커’까지 등장한 것이다. 인터넷 등에서는 요즘 보험사들이 금융당국 눈치를 보느라 민원 제기에 꼼짝 못하는 상황을 이용해 보험금을 많이 받을 수 있다며 연락번호를 남긴 브로커들을 쉽게 검색할 수 있다.

상대적으로 민원이 많아 금융당국이 ‘50% 감축’을 지시한 보험권에서 브로커 개입사례가 특히 많다.

한 생명보험사 관계자는 “손해사정사 등이 낀 브로커 조직이 소비자를 부추겨 민원을 제기하고 보험사를 압박해 당초 제시받은 금액보다 더 받아낸 보험금의 20~30%를 수수료로 떼는 형태가 많다”며 “인터넷과 입소문을 통해 알음알음 활동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브로커가 소비자의 잃어버린 권리를 찾아주는 순기능을 할 때도 있지만 상당수는 무분별한 민원 제기로 이어진다. 상품 판매 시 충분히 설명을 하고, 약관에 명시된 기준에 따라 보험금이 지급됐는데도 “금액 산정이 잘못됐다”며 일단 민원을 제기할 것을 권유하는 브로커가 적지 않다. 한 보험사 민원담당 임원은 “분기마다 금융당국에 민원 감축 실적을 보고해야 하는 상황이라 ‘민원을 제기하겠다’며 브로커를 끼고 보험금 증액을 요구하는 가입자와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합의하기도 한다”고 전했다. 또 ‘보험금을 더 받아주겠다’며 접근한 뒤 착수 수수료만 챙긴 뒤 잠적하는 등의 피해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소비자로서는 브로커에게 수수료를 주더라도 보험금을 더 받으면 된다는 생각에 쉽게 유혹에 넘어가게 된다. 사고 후 일처리 결과에 따라 보험금 수령액이 크게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예컨대 1억원짜리 상해보험에 가입한 뒤 사고가 나면 후유장해등급 결과가 중요해진다. 1급이면 1억원, 6급이면 1000만원만 받는 식이라 한 등급만 달라도 보험금이 두세 배씩 차이가 나기도 한다.

최근에는 행정사까지 민원 브로커에 동원되고 있다. 행정사는 행정기관에 제출하는 서류를 작성하고 제출하는 등의 일을 도와주는 전문 자격인이다. 한 보험사 관계자는 “예전에는 조직 폭력배 등을 동원해 금감원이나 보험사 앞에서 행패를 부리는 수법이 많았지만 요새는 브로커를 동원한 조직적이고 전문적인 양상으로 바뀌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에 대해 보험협회 관계자는 “민원 제출을 협상 수단으로 활용해 억지로 보험금을 더 받아보려는 생각에서 브로커에 의지하는 것은 선량한 다수 가입자들의 보험료 인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김은정 기자 ke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