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은의 ‘언젠가’ /갤러리도스 제공
김송은의 ‘언젠가’ /갤러리도스 제공
서울 팔판동의 갤러리도스 전시실. 김송은 작가의 ‘기억의 상상력’전(8월6일까지)에서는 뭔가 낯선 기류가 흐른다. ‘언젠가(Someday)’라는 제목이 붙은 붉은색 바탕의 작품은 남녀의 형체를 녹색으로 그리다 만 듯한 모습이고, 다른 한쪽 벽에 나란히 걸린 세 작품은 모노톤의 바탕 위에 각각 커다란 검은색 원이 거친 터치로 그려져 있다.

이런 낯섦은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디자인미술관 1층 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는 ‘스튜디오 지브리 레이아웃전’(9월22일까지)에서도 감지된다. 애니메이션 작품이 아니라 설계도면 같은 종이 위에 거칠게 휘갈긴 만화 영화 캐릭터와 일본풍의 배경이 어지럽게 펼쳐진다. 이 두 전시의 공통점은 드로잉을 전면에 내세운 전시라는 점이다. 드로잉은 원래 전통 회화에서 그림의 기초 작업으로 완성작품에 앞서 그리는 구상과 습작을 말한다. ‘기억의 상상력’전은 작가가 구현하고자 하는 여러 가지 개념을 캔버스에 표현해 겉보기에는 완성작처럼 보이지만 거친 붓 터치와 여러 가지 개념적인 서술이 덧붙여져 종이 위에 그린 드로잉을 연상케 한다.

‘스튜디오 지브리 레이아웃전’은 월트디즈니, 픽사와 함께 세계 3대 애니메이션 제작사로 평가되는 스튜디오 지브리의 독특한 제작 시스템을 엿볼 수 있는 전시다. 레이아웃 시스템으로 불리는 이 제작공정은 연출가가 자신의 생각을 작품 속에 충실하게 반영하도록 하기 위해 만드는 드로잉 작업. 지브리의 공동 설립자인 다카하타 이사오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에 의해 구축됐다. 이번 전시에는 일본 영화 사상 최고의 흥행을 기록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비롯 국내 7080세대에도 친근한 ‘알프스 소녀 하이디’ ‘미래소년 코난’ 등의 레이아웃도 선보인다.

회화에만 머물러 있던 드로잉 개념을 확장하기 위한 시도도 최근 전시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징이다. 회화와 입체의 결합, 미디어 아트를 비롯한 첨단 장르와 가상 공간에 기반을 둔 디지털 아트의 등장으로 드로잉은 실제공간을 넘어 가상공간으로까지 그 범위가 확장되고 있다.

지난 6월1일 막을 내린 하이트컬렉션의 ‘드로잉을 위한 공간들’전은 그 대표적인 예다. 고진영, 정연두, 히라키 사와 등 다양한 매체를 사용하는 6명의 작가가 참여한 이 전시에서 작가들은 새로운 드로잉 개념의 정립을 제안했다. 이 밖에 갤러리 담의 ‘드로잉전’(7월11~20일), 아트스페이스 휴의 ‘드로잉, 쓰고 또 쓰다’(7월5~26일)도 제작 과정의 중요성을 조명한 전시회다.

신지혜 갤러리도스 큐레이터는 “완성작이 관객의 시선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부담스러운 존재인 데 비해 드로잉은 작가가 관객을 의식하지 않고 솔직하고 직설적으로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 때문에 작가의 완성작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작품”이라며 드로잉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정석범 문화전문기자 sukbum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