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대 철강도시 포항이 침체에 빠져들고 있다. 세계 철강 수요 위축으로 포스코 등 300여개 철강기업이 감산 등 비상경영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철강기업들의 긴축 경영은 지방 세수 감소와 소비 둔화로 이어져 포항 지역경제에 빨간불이 켜졌다. 이에 따라 철강산업을 대체할 신산업을 찾지 못하면 어려움에 처할 것이라는 위기감이 확산되고 있다. 포항 발전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최근 미국 시애틀시와 피츠버그시를 방문하고 돌아온 김용민 포스텍 총장(59)을 지난달 30일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김 총장은 “21세기 연구 중심 대학은 상아탑이 아니라 열린 대학”이라며 “포항 지역경제 회생에 포스텍이 앞장서겠다”고 강조했다.

김용민 포스텍 총장은 “앞으로는 대학이 지역 발전의 주체로서 교육·연구는 물론 사회·경제·문화 등에서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인식 기자
김용민 포스텍 총장은 “앞으로는 대학이 지역 발전의 주체로서 교육·연구는 물론 사회·경제·문화 등에서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인식 기자

▷대학이 지역경제 회생에 앞장선다는 게 다소 의외입니다.

“2년 전 총장 부임 후 대학과 지역사회 간 단절의 벽이 너무 두껍다는 느낌을 가졌습니다. 1986년 설립된 포스텍은 포스코와 포항시민 덕분에 27년의 짧은 역사에도 세계적인 연구 중심 대학으로 발전할 수 있었죠. ‘개교 50년 미만 세계 100대 대학’ 랭킹에서 올해로 2년 연속 1위로 선정되기도 했고요. 하지만 포스텍은 지역 발전을 위해 그리 많은 역할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총장 부임 전 29년간 일한 미국 워싱턴대는 졸업생의 75%가 워싱턴주에 남아 지역 발전 선순환에 노력하는데 포스텍은 그렇지 않더군요. 지난해 6월 포항지역 각계 지도층이 참여한 ‘AP(Advance Pohang)포럼’을 발족한 것도 비슷한 맥락입니다. 대학이 지역 발전의 주체로서 교육·연구는 물론 사회·경제·문화 등에서 역할을 하며 10~20년 후 포항의 미래를 준비하자는 취지였죠. 매달 한 차례 전문가를 초빙해 조찬 세미나를 여는데 회원이 140명에 이릅니다.”

▷AP포럼 첫 사업이 시애틀시와 피츠버그시 방문이었는데요.

“지난 7월12일부터 21일까지 8박10일간 시애틀시와 피츠버그시의 대학·기업·상공계 등을 둘러보는 기회를 마련했습니다. 박한용 포스코교육재단 이사장과 최병곤 포항상의 회장, 나주영 포항철강공단 이사장, 철강기업 대표 등 13명이 참여했는데, 유익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여행사를 거치지 않고 1년 전부터 직접 현지에 가서 계획을 짰습니다. 시애틀시와 피츠버그시는 항공산업과 철강산업 호황으로 발전을 거듭했지만 주력산업 침체로 도시 전체가 위기를 맞았다가 신산업 발굴로 번영을 되찾았다는 점에서 포항에 시사하는 바가 큰 도시지요.”

▷철강도시 피츠버그에선 어떤 시사점을 얻었습니까.

“피츠버그시는 철강산업이 위기에 직면한 1980년대 초 생존의 기로에 놓였습니다. 이때 피츠버그시가 택한 전략이 바로 기술 연구에 대한 투자를 늘리는 거였습니다. 피츠버그시는 지역 대학 연구소에 주정부 지원 예산을 집중 투자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컴퓨터 소프트웨어 산업, 생명공학 관련 산업이 둥지를 틀게 됐습니다. 수십년에 걸친 ‘변신 전략’이 효과를 발휘하면서 ‘철강도시 피츠버그’는 불황의 영향을 가장 덜 받는다는 교육과 의료 산업을 대표 산업으로 하는 도시로 탈바꿈했습니다. 변신하기까지 대학의 역할이 컸죠. 카네기멜론대는 산학 협력을 통해 170개 이상의 기업을 탄생시켰고, 피츠버그대병원은 연간 매출 100억달러에 5만4000여명을 고용하는 미국 최고 수준의 의료기관이자 고용창출 기관이 됐습니다. 철강산업 종사자가 전체 인구의 10%에서 1%로 줄어들면서 재정도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하고 있고요. 포항의 부활이 불가능한 일이 아님을 피츠버그에서 본 거죠.”

▷시애틀도 많은 변화가 있었겠지요.

“1970년대 시애틀은 ‘보잉버스트(Boeing Bust)’로 불리는 보잉사 최악의 경영 위기로 실업률이 12%까지 치솟는 등 미국에서 가장 어려운 도시로 전락했습니다. 40여년이 흐른 지금 워싱턴주 최대 도시인 시애틀과 인근 지역은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보잉 코스트코 스타벅스 노드스트롬 등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대기업의 요람이 됐습니다. 변화 뒤에는 워싱턴대가 자리를 잡고 있더군요. 수많은 기업이 워싱턴대 연구실에서 탄생했고, 시애틀로 유입되는 벤처캐피털 투자액은 매년 10억달러가 넘습니다. 실리콘밸리 태생인 구글 징가 세일즈포스 등도 워싱턴대 출신 엔지니어들과 함께 일하기 위해 시애틀에 새 터전을 마련했습니다. 워싱턴대가 노벨상 12명, 퓰리처상 13명, 필즈상 1명 등의 수상자를 배출한 것도 탄탄한 산학 협력 덕분에 가능했던 겁니다. 워싱턴대가 직간접으로 고용하는 인원은 7만여명으로 보잉 마이크로소프트에 이어 미국 세 번째입니다. 졸업생의 75%가 워싱턴주에 자리잡는 것은 포항이 꼭 벤치마킹하고 싶은 미래상입니다.”

▷시애틀과 피츠버그가 변신하기까지 지역 여론도 중요했을 텐데요.

“시애틀시와 피츠버그시 부활의 공통점은 시정부 기업 대학 등 지역 내 다양한 기관이 지역경제 부활이라는 공통 주제를 놓고 끊임없이 소통했다는 겁니다. 피츠버그시 지역발전협의체인 앨러게니 콘퍼런스(Allegheny Conference)는 320여개 기업이 주도하는 비영리 민간 협의체로 70년의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대학이 회원 기관으로 참여해 지역사회 발전을 주도하고 있는 것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지역 발전에 대한 시민들의 협력도 주목해야 합니다. 2001년 완공된 ‘PNC 파크’ 야구장은 당시 2억달러의 공사비를 기업과 시민들이 기부한 성금으로 충당했습니다. 지역 발전을 위해 노동조합도 함께하는 피츠버그지역협의체는 포항 발전을 위한 본보기로 삼을 대표적 협의체로 평가됩니다. AP포럼도 이런 역할을 하도록 해야죠.”

▷김 총장의 이색 행보에 교수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다고 들었습니다.

“그동안 국내 대학은 아카데믹한 연구에 치중하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이제는 연구 성과를 사업화·상품화해 세상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기술사업화의 핵심이 바로 융합입니다. 300m 산은 혼자 오를 수 있지만 6000m의 산을 오르려면 여럿이 함께 도와야 합니다. 포스텍은 연구실 및 학과 간 칸막이를 낮추는 문화를 계속 만들어 나갈 겁니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미디어랩처럼 인문 문화 예술 등을 배워 이를 융합하는 인재도 육성해야지요. 지능형 로봇, 유비쿼터스 헬스, 지능형 융합자동차, 휴먼웨어 컴퓨팅 등에서 향후 10년간 정보기술(IT) 융합 인재 350명을 키워 포항의 미래 동력으로 자리 잡도록 할 계획입니다.”

▷한 달 뒤면 취임 2주년을 맞습니다.

“포스텍 교수들의 연구 능력이나 학생의 자질, 연구 시설 등은 일정 수준 이상입니다. 다만 교육과 연구의 수월성(秀越性)을 협력적 분위기에서 진실하게, 윤리적 기반에서 개방적이고 투명하게 밀고 나가는 분위기가 다소 미흡합니다. 포스텍의 우수 시설과 공간에 수월성의 문화가 빨리 정착되도록 하려고 합니다. 대학의 지식재산권 상용화를 장려하고 기업가정신이 확산되도록 유도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평소 포스텍 학생들에게 ‘연어’가 되라고 주문하시는데요.

“연어를 잡아보면 상처가 굉장히 많습니다. 물과 부딪히면 넘어서려고 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젊은이들에게 연어의 모험성과 역동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대학이 산업을 선도하려면 결국 원천 핵심 기술을 창출할 수 있는 연구가 진행돼야 합니다. 이런 연구는 실패 가능성이 높고 안전하지 않다는 인식 때문에 기피하죠. 실패도 교육의 일부인데 말이죠. 당장은 불편하고 고통스럽더라도 5년 뒤 스타가 되고 10년 뒤 슈퍼스타가 되고 20년 뒤 노바(샛별)가 되는 가능성을 중단 없이 추구할 때 과학기술 연구의 노바인 노벨상도 자연스럽게 따라올 수 있을 겁니다. 포항의 새로운 부활에도 이렇게 용기가 필요합니다.

포항=하인식 기자 hais@hankyung.com


■ 김용민 총장은

제주 출신으로 1975년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위스콘신대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2년 시애틀의 워싱턴대 조교수로 임명됐고 1990년 정교수가 됐다. 전자공학과 교수이면서 생명공학과 컴퓨터공학, 방사선의학과 교수를 겸임해 학제 간 융합 연구를 주도했다. 8년간 생명공학과 학과장을 맡아 이 학과를 미국 대학 전체 학과 평가에서 톱5까지 끌어올렸다.

멀티미디어 비디오 영상 처리와 의료영상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로 연구 성과 대부분을 사업으로 연결시켰다. 2011년 국제학술단체 국제전기전자공학회(IEEE) 산하 의학생명공학회(EMBS)가 산학 협력에 탁월한 업적을 거둔 학자에게 주는 ‘모얼락상’을 받았고, 이후 EMBS 회장을 지냈다.

그는 워싱턴대 재직 중 210여개의 지식재산권 등록, 30여개 회사 창업, 80여건의 기술 이전을 이끌어 냈다. 미국국립보건원(NIH) 연구비도 미국 내 최고 수준인 연간 260억원가량을 받아냈다.

2011년 9월 포스텍 총장에 취임한 그는 지난해 4월 ‘총장 장학금’도 만들었다.

워싱턴대 교수 시절 일본 히타치사의 의료기기 개발 연구비 가운데 총장 부임으로 사용하지 못한 16억원을 장학기금으로 내놓은 것이다. 남은 연구비는 되돌려줘야 하지만 워싱턴대와 히타치사가 그를 위해 장학금 전환을 허락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