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양화진의 헐버트 父子
정부 수립 이듬해인 1949년 7월29일 오후, 프레지던트호가 인천항에 도착했다. 배에는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던 미국 선교사 헐버트 박사가 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도 그가 보이지 않자 마중 나간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갔다. 86세의 백발 노인은 선실 한쪽에 기대어 있었다. 그를 껴안다시피 해서 나온 이들은 마침 미 군사고문단장 부인을 환영하러 나온 의장대에게 즉석 사열식을 부탁했다. 노인의 눈에 눈물이 어렸다. 그가 63년 전 스물네 살에 처음 내린 곳이었다.

그날 밤 서울 빅토리호텔에 도착한 뒤 숨을 헐떡이던 그는 곧 청량리 위생병원에 입원했고 1주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출발 전 인터뷰에서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땅에 묻히기를 원한다”고 한 말이 유언이 됐다. 이승만 대통령은 최초의 외국인 사회장으로 극진히 예우했고 서울 합정동 양화진 선교사묘지에 안장했다.

한국이름 헐벗, 흘법(訖法), 할보(轄甫)로 불렸던 그는 1886년 육영공원 영어교사를 시작으로 청년교육에 헌신했고, 고종의 고문으로 외교 창구역할을 하며 헤이그 밀사 파견 등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한글을 빨리 배워 3년 만에 한글교과서 ‘사민필지’를 저술했고, 구전 아리랑을 채보해 훗날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등재에도 공헌했다. YMCA를 창설한 그는 선교를 앞세우지 않고도 이승만, 서재필 등 수많은 청년에게 기독교 정신과 독립정신을 일깨웠다.

그는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어났을 땐 언더우드 등과 함께 고종의 침전에서 불침번까지 섰다. 1903년부터는 더타임스와 AP통신 객원 특파원으로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국제사회에 알렸고, 일제에 의해 추방당한 뒤에도 한국의 독립을 국제사회에 호소했다. 3·1운동 후엔 미국 상원에 일본의 잔학상을 고발했다.

1944년에도 “루스벨트 대통령이 고종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아 동양 역사가 바뀌었고, 미국이 친일정책을 썼기 때문에 태평양전쟁이 일어났다”며 미국을 강하게 질타해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정부가 그를 외국인 최초로 ‘이달의 독립운동가’에 선정한 데 이어 64주기 추모식을 양화진에서 오는 12일 연다고 한다. 그의 묘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작은 묘비 하나가 있다. 한국에서 생후 13개월 만에 꽃봉오리를 펴보지도 못하고 먼저 간 그의 아들 무덤이다. 그가 ‘한국인에게 쌀 같은 존재’라고 했던 아리랑의 악보와 가사를 정리한 이유는 핏덩이 아들을 잃은 슬픔을 달래기 위한 것이었다는 얘기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토록 한국 땅에 묻히고 싶어했던 염원도 이렇게 아픈 사연 때문이었을까.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