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일본 회화를 좋아해. 거기서 영향을 받았어. 인상주의자들은 이 점에서 똑같단다.” “요즘 내 모습이 바뀌고(일본 승려처럼 삭발한 것을 의미), 더욱이 일본 사람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있어.”

파리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1888년 지중해의 소도시 아를에 내려간 빈센트 반 고흐가 파리에서 화상으로 활동하고 있던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는 우리를 무척 당혹스럽게 만든다. 인상주의자들이 모두 일본 회화를 좋아하고 일본인처럼 삭발까지 했다고 우쭐대는 고흐의 광적인 일본 숭배의 배경은 무엇일까. 어떤 이는 고흐의 개인적인 취향으로 치부하려 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말은 사실이다. 인상주의자는 물론이고 당대 유럽의 거의 모든 화가가 일본병을 앓았다.

우리는 왜 그동안 이 사실을 몰랐던 것일까. 여기에는 불편한 진실이 숨어 있다. 학교에서 진실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반일감정이 들끓었던 해방 이후의 우리 정서는 한국 문화의 우수성을 부각시키기에 바빴지 일본이 나름대로 갖고 있는 장점을 인정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인상주의자들의 일본 미술 애호는 서구 회화의 위기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산업혁명 이후 대중 소비문화가 발달하면서 화가들은 시대 변화에 걸맞은 새로운 회화를 모색하게 되는데 때마침 등장한 사진술은 사실적 재현을 중시하던 전통 회화의 존립 기반을 뿌리째 흔들어 놨다. 뭔가 혁신적인 회화 원리가 절실했다. 그런 갈증이 유럽 미술계, 특히 당대 세계 예술의 중심이던 파리 화단을 지배했다.

이런 와중에 프랑스의 화가들은 우연히 에도시대 일본의 채색판화인 ‘우키요에’를 접하게 된다. 파리 만국박람회에 민예품을 출품한 일본인들이 도자기의 포장지로 우키요에의 파지를 사용했는데 이것이 한 프랑스 판화가의 눈에 띈 것이다. 이 새로운 그림은 그들의 갈증을 채우기에 충분했고 화가들은 너도나도 발 벗고 수집에 나섰다.

우키요에는 사실적인 대상에 토대를 둔 것이지만 서양회화에서 볼 수 있는 사실적 재현이 아니라 작가 자신이 미적으로 재구성한 판타지의 세계였다. 가장 놀라운 것은 파격적인 구도였다. 풍경화를 그릴 때 가까이 있는 대상을 클로즈업하고 배경은 저 멀리 작게 묘사함으로써 가까운 대상과 먼 대상의 거리감을 극단적으로 대비시켰다. 히로시게의 ‘가메이도의 자두나무 과수원’을 보라. 놀랍게도 전면의 자두나무를 과감하게 절단하고 있다. 서양의 화가들은 상상조차 하지 못한 금단의 영역을 건드린 것이었다. 선원근법과 대기원근법이 투시법의 전부인 줄 알았던 서구화가들은 우키요에를 보고 무릎을 쳤다.

색채 구사 방식도 충격을 안겨줬다. 우키요에 화가들은 색채의 객관성 따위는 개의치 않았다. 그림이 아름답게 보이기만 하면 됐다. ‘가메이도의 자두나무 과수원’에서도 그런 주관적인 색채의 원리가 지배하고 있다. 히로시게는 나무 아래의 풀밭은 초록색으로 묘사했지만 하늘은 푸른색이 아니라 붉은 색으로 처리했다. 초록색과 붉은 색이 더 잘 어울리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회화원리를 찾아 헤매던 인상주의 화가들은 마치 정답이라도 찾은 듯 쾌재를 불렀다. 일본 미술에 대한 무관심은 곧 낙오를 의미했다.

우키요에가 인상주의와 후기 인상주의 회화에 남긴 자취는 지대했다. 고흐가 아를에서 1888년 11월 제작한 ‘씨 뿌리는 사람’을 보면 ‘가메이도의 자두나무 과수원’에서 볼 수 있는 회화원리를 그대로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앞쪽의 나무는 아래위가 잘린 채 중간 부분이 클로즈업돼 있고 씨 뿌리는 사람의 다리도 잘렸다. 색채도 주관적이다. 해 질 무렵이라 밭은 분명 금빛으로 반짝일 텐데 고흐는 이것을 청색으로 바꿔놓았다.

물론 관객은 경악했다. 앵데팡당 전에 출품된 모네의 둥치 잘린 나무 그림을 보고 관객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분명한 것은 일본 미술은 적어도 서구 미술이 사실적 재현에서 주관적 해석으로 나아가는 데 중요한 자극제가 됐다는 점이다. 그것은 일과성 유행이 아니라 ‘자포니즘(일본주의)’이라는 하나의 사조로 일컬어질 만큼 영향력이 큰 것이었다. 고흐의 말은 결코 과장된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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