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프리즘] 기업과의 소통, '판'을 바꿔라
박근혜 대통령이 이틀에 걸쳐 10대 그룹 총수 및 중견기업 대표들과 각각 오찬간담회를 했다. “분위기가 진지했고, 좋았다”는 게 참석자들의 전언이다. 대통령은 기업들의 현안에 대해 “걱정하는 걸 잘 알고 있다”고 했고, “경제에 찬물을 끼얹는 입법은 심각한 문제”라고도 했다. 박용만 대한상의 회장은 “기업인들의 노력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려고 애쓰는 진심이 느껴졌다”고 했다.

그런데도 이번 행사를 ‘삐딱하게’ 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판에 박힌, 또 한번의 이벤트였을 뿐”이라는 비판도 들린다. 제한된 시간에 그 많은 참석자들이 얼마나 진솔하게 얘기를 나눌 수 있었겠느냐는 의구심도 내놓는다. 역대 대통령들이 비슷한 행사를 했던 데서 오는 ‘기시감(旣視感)’ 탓일 수도 있다.

정권마다 되풀이되는 '이벤트'

이번 행사보다 훨씬 더 ‘오붓하게’ 기업인들과 대화를 나눈 사례도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취임 직후 4대 그룹 총수들만 따로 불러 삼계탕집에서 오찬간담회를 가졌다. 임기 중반에 4대 그룹 총수들과 청와대에서 또 한차례 회동했다. 하지만 이런 행사가 대통령과 재계 사이의 진정한 소통으로 이어졌다고 믿는 사람은 많지 않다.

언론에 일정을 미리 공개하고, 오찬을 곁들인 한정된 시간에 흉금을 털어놓는 대화가 오가기는 쉽지 않은 탓이다. 대외홍보용 이벤트 성격이 짙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시장경제의 핵심 축을 이루는 기업의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고 정책에 반영하기 위해서라면, 이제까지의 틀을 뛰어넘는 소통의 장(場)이 필요하다.

기업인들과의 소통에 충분한 시간을 할애하고, 그 결과를 정책에 반영해 경제체질을 튼튼하게 바꿔놓은 대표적인 국가 지도자로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과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가 꼽힌다. 두 지도자 모두 진보 정당(민주당, 사회민주당) 소속이라는 사실이 흥미롭지만, 위기에 몰린 국가경제를 재건하기 위해 ‘경제 최전선의 전사(戰士)’들로부터 통찰력과 지혜를 빌리는 데는 이념의 차이가 문제될 수 없었다.

'시장의 지혜' 빌린 클린턴, 슈뢰더

클린턴 전 대통령은 여름휴가철마다 매사추세츠주 마서스비니어드의 휴양지로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회장, 잭 웰치 GE 회장, 샌퍼드 웨일 씨티그룹 회장 등 경제계 지도자들을 초대해 밤 늦게까지 칵테일 파티를 즐기며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들로부터 정보기술(IT) 인프라의 중요성을 반복적으로 학습받고는 앨 고어 부통령에게 책임을 맡겨 ‘정보고속도로(information super-highway)’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그 결과로 탄생한 것이 구글 페이스북 플립보드 등 세계시장을 쥐락펴락하는 IT 소프트웨어 기업들이다.

슈뢰더 전 총리는 1990년대 이후 독일 경제가 경직적인 노동시장, 과도한 사회보장 지출, 기업에 대한 과다 규제 등으로 인해 구조적인 경기둔화와 실업률 증가의 늪에 빠지자 ‘결단’을 내렸다. 폭스바겐 회장을 맡고 있던 기업가 페터 하르츠에게 경제정책 개혁의 임무를 준 것이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게 해고방지 규정을 완화하고, 실업수당 수급기간을 단축하고, 고용과 복지를 통합해 독일의 노동시장과 경제를 되살린 2003년의 ‘하르츠 개혁안’이다.

클린턴과 슈뢰더는 강단 학자들의 ‘이론지(理論知)’가 아니라, 경제현장에서 사활을 건 기업경영을 하며 축적한 기업가들의 ‘현장지(現場知)’에 귀를 기울여 경제부흥의 길을 닦았다. 기업을 ‘민주화’가 아닌 ‘경청’의 대상으로 삼은 그들의 통찰력이 부럽다.

이학영 편집국 국장대우 ha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