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냐 카지아도에서 마사이족이 진료를 받기 위해 대기하고 있다.  연합뉴스
케냐 카지아도에서 마사이족이 진료를 받기 위해 대기하고 있다. 연합뉴스
아프리카 케냐에 사는 잭 우루와 샘 아구투는 어릴 적부터 친구였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함께 지내다 나란히 건강보험업계에서 일자리를 찾았다. 둘 다 보험 중개인으로 적잖은 돈을 벌었다. 빈국 케냐에서는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의 돈이었다.

하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다. 보험업계에 있으면서 케냐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봤기 때문이다. 케냐에서 보험에 가입한 사람은 10%밖에 안된다. 국가가 강제하는 보험과 민간 보험을 통틀어서다. 특히 전체 근로자의 77%를 차지하는 자영업자들의 보험 가입률이 극히 낮다.

게다가 민간 보험은 너무 비싸다. 개인이 가족까지 보장하는 보험에 가입하기 위해 필요한 돈은 한 해 600~900달러 정도다. 케냐 1인당 국내총생산(GDP) 1800달러의 거의 절반에 이른다. 우루는 “50센트면 치료할 수 있는 말라리아도 2~3달러밖에 못 버는 저소득층에겐 부담이라 이로 인해 고통에 시달리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우루와 아구투는 ‘받은 만큼 돌려주기로’ 결심했다. 2008년 누구나 쉽게 적은 금액으로 가입할 수 있는 보험회사 창가므카 마이크로헬스를 설립한 이유다.

○“휴대폰으로 가난한 사람 살리자”

케냐에서 보험 가입률이 낮은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는 돈이 없어서다. 먹고 살기도 팍팍한데 보험 가입을 할 여유는 없다. 둘째는 보험이라는 개념이 어려워서다. 돈을 미리 내고 나중에 무슨 일이 생기면 지원하겠다는 개념은 가난한 케냐인들에겐 너무 복잡하다. 국가적으로도 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다 보니 누가 보험에 가입했는지 파악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비가입자를 가입하도록 유인하기도 힘든 구조다.

휴대폰 문자만 보내면 어디서든 저금하듯 보험 가입…빈민시장 뚫은 '보험의 혁명'
창가므카는 ‘보험’ 대신 ‘저축’이라는 개념을 활용했다. 또 케냐 인프라 중 거의 유일하게 잘 깔려 있는 휴대폰을 활용하기로 했다. 일단 ‘메디 세이브’라는 카드를 출시했다. 고객들은 이 카드를 산 뒤, 아무 때나 휴대폰 문자로 자기 수중에 있는 돈을 ‘메디 세이브’ 계좌에 저금할 수 있다. 이는 또 다른 휴대폰 기반 금융 서비스인 ‘엠파사’ 때문에 가능했다.

엠파사는 케냐 최대의 통신사인 사파리콤이 제공하는 금융 서비스다. 사실상 은행과 마찬가지로 저축과 송금, 소액대출까지 가능하다. 워낙 은행 인프라가 부실해 통신사가 은행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케냐 성인 75%가 엠파사에 가입해 있다. 고객들은 낮이든 밤이든 언제든지 ‘언제 아플지 모르니 조금이라도 저축해야겠다’ 싶으면 문자로 메디 세이브에 50센트든, 1달러든 쌓아 놓으면 된다.

동시에 창가므카는 병원들과 계약을 맺었다. 메디 세이브 회원이 오면 치료비를 10%씩 깎아주도록 했다. 회원들은 단순히 싸게 진료를 받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복잡한 수속 절차도 밟을 필요가 없다. 창가므카와 병원이 미리 계약을 해 놔서다. 병원뿐 아니라 약국이나 보건소 등에서도 사용할 수 있다. 케냐 수도 나이로비 인근 빈민촌에 사는 헬렌 오스테노는 “메디 세이브는 은행에 갈 필요 없이 아무때나 나의 미래를 위해 돈을 모으게 해 줘서 편리하다”고 말했다.

○‘생명을 살리는 돈 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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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를 사용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여성들이 소외되는 것이다. 남존여비(男尊女卑)가 심한 케냐 사회에서 여성들이 메디 세이브를 통해 돈을 모아 놓으면 남편이나 남자 친구가 “내가 아프니 그 돈을 써야겠다”고 카드를 빼앗는 사례가 종종 발생했다.

창가므카는 여성, 특히 임산부만을 위한 카드를 새로 출시했다. 이용 방법은 기존 메디 세이브와 같다. 다만 산부인과에서만 사용할 수 있게 했다. 열악한 여성들의 처지를 고려해 산부인과와는 진단별 고정된 가격에 서비스를 제공하도록 계약을 맺었다. 이를 통해 수천명의 여성들이 건강한 아이를 출산하게 됐다.

카드를 사용하는 과정에서 오류도 자주 발생했다. 카드 결제 시스템이 한국처럼 잘 갖춰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창가므카는 온라인 상에서 모든 결제를 처리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정비했다. 또 환자의 진료, 처방 기록을 창가므카 홈페이지에서 의사들이 볼 수 있게 했다. 국가에서 환자들의 병력 관리를 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회원들은 지역 어느 병원에 가도 과거 병력에 근거한 진료를 받을 수 있게 됐다.

그럼에도 메디 세이브 시스템은 ‘보험’이라기보다는 ‘사전 저축’에 가까웠다. 이 경우 정말 많은 돈이 드는 질환에 걸렸을 경우 치료가 어렵다. 창가므카는 지난해 말 다시 한 번 시스템을 업그레이드했다. 케냐 최대의 보험사인 브리티시아메리칸보험, 통신사 사파리콤과 손잡고 진짜 보험 상품을 출시한 것이다. 물론 부자들이 아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다.

돈을 모으는 단계까지는 메디 세이브와 똑같다. 다만 140달러가 모이면 자동으로 보험에 가입된다. 이 보험은 이후 6개월간 대부분의 질병에 대한 비용을 지원한다. 필요할 경우 장례비용과 치과비용도 부담한다. 소규모 ‘건강보험+상조+치과보험’인 셈이다. 서민들은 조금씩 돈을 모아서 짧은 기간이나마 보험 혜택을 누릴 수 있다.

지난 8월 기준 메디 세이브에 1만2000여명, 여성 전용 카드에 3000여명, 보험프로그램에 8000여명이 가입했다. 아직 비영리기구나 개인들의 기부금에 의존하는 비중이 작지 않지만, 수익도 내기 시작했다. 영국 BBC는 “수백만명이 가입한 건 아니지만 의미있는 성과”라고 평했다. 그만큼의 생명을 살릴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남윤선 기자 inkling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