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골목길, 디스켓, 라디오의 추억
매일 아침 출근하다 보면 한남동을 지나게 되는데 한강을 내려다보는 곳에 많은 집들이 모여 있고 집과 집 사이에 난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이 눈에 들어온다. 누구나 어린 시절 동네 어귀나 골목에서 놀던 추억이 있을 텐데 이제는 도시화에 밀려 골목길이 사라지고 있다. 거주자들의 주차공간도 필요해지고 범죄의 위험성이나 소방방재상의 비효율성을 이유로 도시 재개발이라는 명분 아래 골목길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몇 년 전 서울시내에 남아 있는 골목길들을 직접 답사해 사진과 스케치를 곁들여 엮어낸 ‘서울 골목길 풍경’이라는 책이 출간됐다. 그 책의 서문을 보면 작가의 어린 딸은 그때까지 ‘골목길’이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기술 발전과 사회 변화에 따라 익숙한 것들이 사라지는 현상은 중장년층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변화의 속도가 워낙 빨라지다 보니 젊은 세대에게도 같은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요즘 10대 청소년들은 ‘저장’을 의미하는 컴퓨터 아이콘이 왜 그런 모양인지 모른다고 한다. ‘저장’ 아이콘은 디스켓 모양을 하고 있고, 디스켓이라면 필자도 익히 아는 바인데 청소년들이 왜 모를까? 이유는 간단하다. 지금은 디스켓을 거의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컴퓨터가 처리하는 데이터가 문자에서 영상·음성 위주로 바뀌다 보니 필요한 저장 용량이 폭증했고, 이동식 저장 도구도 용량이 작은 디스켓에서 USB 메모리 같은 대용량 저장매체로 대체된 것이다.

변화로 인해 사라지는 것도 있지만 꾸준히 사랑받고 살아남는 것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라디오다. 많은 사람이 TV의 출현으로 라디오가 사라질 것이라고 예상했고, ‘Video killed the radio star’라는 노래가 나올 정도로 라디오의 종말을 예단하기도 했다. 하지만 라디오는 인터넷 시대에도 여전히 인기를 끌고 있고, 스마트폰을 통해 더 두터운 이용자층을 형성하고 있다. 다양한 첨단 매체와 네트워크가 출현했지만 여전히 아날로그적 감성으로 사랑받고 있는 것이다. 골목길과 디스켓, 라디오는 급변하는 사회에서 숨가쁘게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의 여러 단면이자 자화상이다. 변화 속에 묻혀 멀어져 갈 수도 있고 꾸준히 사랑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익숙한 것들이 너무 쉽게 사라져 가는 것은 무척 아쉬운 일이다. 훗날 유산이 될 수 있는 문화적 가치가 있는 것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의 추억이 어려 있는 사물이나 장소도 경시돼서는 안 될 것이다. 아날로그와 디지털, 전통과 첨단이 공존해야 그 문화의 깊이가 더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김규복 < 생명보험협회장 gbkim@klia.or.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