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팀 리포트] '연극 1번지' 대학로, 화재사고엔 무방비…공연 시작벨은 울려도 비상벨은 안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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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장 150여개로 늘었지만 규모 영세하고 안전시설 미비…소화기도 없고 비상등도 없어
주말엔 불법주차로 길 막혀 소방차 접근 어렵게 하기도
주말엔 불법주차로 길 막혀 소방차 접근 어렵게 하기도
#. 추석 연휴 기간인 지난 20일 오후 7시40분 서울 혜화동 대학로의 한 소극장 입구. 좁고 가파른 계단 17개를 내려서자 20㎡(약 6평) 남짓한 무대가 눈에 들어왔다. 공연을 기다리는 관객들은 나무 단상 위에 놓인 플라스틱 등받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무대와 관객들이 앉아 있는 단상, 극장 벽면에는 검은 색 페인트가 짙게 칠해져 있었다. 출입구가 한 곳뿐인 좁은 지하 공간에는 목재와 천 등 각종 가연성 물질이 가득했지만 스프링클러나 소화기 등은 찾아볼 수 없었다.
#. 지난 21일 오후 3시40분께 대학로 레스토랑 마당 한 쪽에 서 있는 조립식 건물. 문을 열고 들어가자 36㎡(약 11평) 남짓한 무대와 무대를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나눠져 있는 객석에 40여명의 관객이 앉아 있었다. 이곳 역시 목재로 만든 단상과 플라스틱 등받이 의자로 객석을 채웠고 단상과 벽면을 페인트로 검게 칠했다. 분장실까지 다녀봤지만 소화기를 찾을 수 없었다. 비상구를 표시하는 안내등도 꺼져 있었다.
대한민국 공연문화의 메카 ‘대학로’가 위험하다. 체계적인 문화공간 조성을 위해 2004년 문화지구로 지정한 지 10년. 공연장 150여곳에 연간 300만명의 관객이 몰리는 공연문화 1번지로 성장했지만 성장 뒤에 가려진 안전 불감증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현재 대학로 공연장은 153개(인가 88개, 미인가 65개). 이 가운데 연면적이 300㎡(약 90평)를 넘어 스프링클러나 살수 장치를 의무적으로 갖춰야 하는 문화·집회시설은 8곳에 불과하다. 대다수 소극장들은 화재 위험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다. 한 연극계 원로는 “문화지구 지정에 대한 기대심리로 극장이 생겨서는 안 되는 곳에까지 극장이 들어서 공연 환경과 안전 여건이 더 나빠졌다”고 안타까워했다.
○공연 위해 무대세트로 출입구 막아
27일 연극계와 대학로 부동산중개업소에 따르면 대학로 공연장의 70%가량은 건물 지하에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대학로의 경우 오래된 건물이 많아 소극장 중에는 지하로 통하는 출입구가 한 군데밖에 없는 곳도 있어 화재시 큰 피해가 우려된다. 출입구가 2개 이상 있더라도 공연 중에는 공연에 몰입할 수 있도록 무대 세트로 출입구를 가려 놓거나 밖에서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을 잠그는 공연장이 많다고 한 연극인은 털어놨다. 박덕규 씽크탱크 부동산 대표는 “지금 있는 극장의 3분의 2가량이 애초에 공연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공간이 아니었다”며 “호프집 식당 등을 개조해 쓰다 보니 불이 나면 더 위험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꼬집었다.
취재에 동행한 종로소방서 관계자는 공연에 사용하는 각종 조명과 전선들도 화재 요인이라고 지적했다. 이날 찾은 한 소극장에서는 모두 27개의 조명을 공연에 사용했다. 30개에 가까운 조명에 전기를 공급하는 전선들이 어지럽게 얽혀 있었다. 대여섯개씩 검은 천으로 둘둘 싸매 천장에 고정시켜 놓거나 피복이 벗겨진 부분을 검은 색 절연테이프로 대충 감싸놓았다. 7년째 대학로에서 연극배우로 활동 중인 이모씨(31)는 “오래된 조명기기 중에는 전류가 밖으로 새는 것들이 있다”며 “조명을 설치할 때면 감전당하지 않을까 조마조마하다”고 말했다.
○연극 한 편 제작비 맞먹는 방염 처리 비용
대다수 대학로 소극장들은 면적 기준을 밑도는 탓에 방염 처리 등의 규제를 받지 않는다. 종로소방서의 이종태 소방위는 “현장 점검을 나가더라도 규모가 작은 대다수 소극장들에 대해서는 소화기 비치 여부와 비상구에 물건을 쌓아 놓지 않게 하는 등의 기본적인 사항만 체크하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관객의 안전을 위해 공연에 사용하는 무대 세트에 방염 처리를 하려 해도 규모가 영세한 극단들은 비용을 감당하기 힘들다. 공재민 서울연극협회 사무국장은 “보통 규모의 소극장에 들어가는 무대 세트에 방염 처리를 하려면 1000만원가량이 필요하다”며 “소극장 연극 한 편의 제작비가 1000만원 남짓한 상황에서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털어놨다.
관람객이 몰리는 주말이면 불법 주차 차량도 화재 현장에 소방차 접근을 어렵게 만들어 대형 화재 유발 요인으로 꼽힌다. 토요일이던 지난 21일 오후 7시께 소극장 8개가 밀집한 대학로 소나무길. 350m 길이의 일방통행로임에도 차량 58대가 빼곡하게 주차돼 있었다. 주차구역 밖의 불법 주차 차량이 33대였다. 종로소방서 관계자는 “폭이 좁은 일방통행로가 대부분인 대학로의 특성상 불법 주차 차량이 한 대만 있어도 소방차 접근이 힘들 수 있다”고 말했다.
○소극장 40%가 ‘미등록 공연장’
전문가들은 소극장들이 화재 예방을 위한 시설 마련에 적극 나서지 못하는 것은 건물주와 극장주, 극단으로 이어지는 공연장 대관 구조 탓이라고 지적했다. 지하에 있는 객석 수 120석 규모의 소극장을 열기 위해 극장주는 임대보증금 1억원, 권리금 5000만원, 시설투자비 1억5000만원 등 모두 3억원가량을 써야 한다. 극장을 빌린 극단이 하루에 내는 대관료는 30만원 수준. 극장주가 투자 원금을 회수하는 데 3년 정도 걸린다. 극장주로서는 상가임대차보호법으로 보장받을 수 있는 기간 안에 투자 원금을 회수해야 하기 때문에 안전시설 투자에 나서기 힘든 구조라는 지적이다.
미등록 공연장이 대학로 전체 공연장의 40%인 65곳에 달하는 것도 문제다. 2011년 공연법이 개정되면서 지난해 1월부터 지방자치단체에 등록해야 하는 공연장의 기준이 객석 수 100석 이상에서 50석 이상으로 엄격해졌다. 소극장의 안전성을 높인다는 게 법 개정 취지였지만 건축물대장 변경과 시설 설치에 드는 비용 부담을 꺼리는 건물주들의 기피로 제대로 효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등록 공연장은 등록 신청과 함께 화재예방 계획과 인명피해 방지 대책을 포함한 재난대처 계획을 제출해야 한다. 미등록 공연장은 적용받지 않는다. 종로구청이 올 1월부터 9월까지 65곳에 대한 계도에 나섰지만 미등록 공연장은 포함되지 않았다.
종로소방서 관계자는 “연면적 300㎡ 이하의 소극장들은 스프링클러와 살수 장치 등을 의무적으로 설치할 의무가 없다”며 “현재로선 지속적인 계도 외에는 뾰족한 대책이 없다”고 말했다.
홍선표 기자 rickey@hankyung.com
■ 문화지구
문화환경 조성을 위해 시·도지사가 조례를 통해 지정할 수 있는 용도지구.
문화예술시설과 민속공예품점 등이 밀집한 지역에 한해 지정할 수 있다. 대학로는 2004년 5월 지정돼 여기에 있는 공연장과 문화시설은 조세 감면과 융자 지원 등의 혜택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