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스트트랙 금융(FTP·fast track program) 지원을 받은 기업이 법정관리에 들어가면 이에 대한 손실을 은행뿐 아니라 함께 참여한 보증기관도 분담해야 한다는 첫 판결이 나왔다. 그동안 기업 지원에 따른 손실액 부담을 두고 은행과 보증기관이 벌여온 공방에서 재판부가 은행 손을 들어주면서 앞으로 비슷한 소송이 잇따를 전망이다.

○“보증기관도 손실액 분담해야”

서울중앙지법 민사42부(부장판사 이건배)는 산업 기업 외환 국민 우리 신한 등 6개 은행이 “FTP 지원 실패에 따른 손실을 함께 분담하라”며 기술보증기금(기보)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했다고 3일 밝혔다.

재판부는 “기보가 신용보증 방식으로만 회사를 지원한다면 투자와 관련해 어떤 위험도 부담하지 않으며 채권 회수를 위한 기회만을 얻어 부당한 이익을 보게 된다”며 “기보는 각 은행에 5000만~6억원 등 모두 14억여원을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이들 은행과 기보는 산업용 기계 제조사인 케이에스인더스트리가 유동성 부족으로 경영에 어려움을 겪자 패스트트랙 금융 지원을 했다.

이들은 기보가 참여한 가운데 자율협의회를 열고 은행별로 3억~32억여원 등 80억원을 지원키로 했다. 회사가 경영 정상화에 실패하면 기보를 포함한 채권은행 모두가 채권액에 비례해 손실을 분담키로 했다. 이후 은행들은 약속한 지금을 지원했으나 이 업체는 정상화에 실패,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이에 채권은행들은 기보에 손실분담금 14억여원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소송을 냈다.

그동안 기보는 기관 설립 목적을 이유로 손실금 지급 거부가 정당하다고 주장해 왔다. 기보법에 따라 기업이 금융회사에서 대출받는 자금에 대해 보증을 하는 방식으로 기업의 자금 융통을 지원하는 업무를 수행하고 있을 뿐 직접적인 자금 융통은 목적 범위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재판부는 “FTP 공동운영지침이 ‘보증’에 한하지 않고 신규 자금 등 다양한 지원 방식을 열거하고 있다”며 “보증기관 역시 패스트트랙 금융 지원 시 보증 외에 다른 방법으로 지원할 근거가 있다”고 판단했다.

○법정관리업체 둘러싸고 소송 잇따를 듯

패스트트랙 금융 지원 제도를 두고 그동안 은행과 보증기관들이 공방을 벌여온 만큼 이번 판결로 보증기관의 부담이 커질 전망이다.

그동안 은행과 함께 채권단에 들어간 보증기관들은 보증에만 관여했지만 회사가 정상화되는 경우가 많아 큰 문제는 없었다. 그러나 경기 불황이 장기화하면서 법정관리에 들어가는 회사가 늘어 손실 부담액을 정산해야 하는 사례가 증가하자 다툼도 많아졌다는 게 업계 설명이다. 기업이 워크아웃에 들어가면 은행은 채권의 만기만 연장하면 되지만 법정관리에 들어갈 경우 해당 채권을 손실로 처리해야 한다.

이번 판결로 은행발 유사 소송이 잇따를 전망이다. 우리 산업 농협 국민 등 지난해 법정관리에 들어간 남광토건 채권은행들도 채권단에 속해 있는 무역보험공사와 서울보증보험에 손실분담금 615억원을 정산해줄 것을 요구했다 거부당하자 소송을 내 현재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금융업계 관계자는 “채무를 갚지 못하는 기업이 늘고 있는 가운데 부실을 줄이려는 보증기관들이 버티다 보니 은행과 다툼이 자주 생긴다”며 “앞으로 보증을 꺼리는 기관이 늘어날 가능성이 있어 기업들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정소람/이상은 기자 ram@hankyung.com

■ 패스트 트랙

일시적인 유동성 위기를 겪는 중소기업을 신속하게 지원하기 위한 프로그램.

채권은행들이 신청 기업을 평가해 만기 연장, 신규 자금 공급 등을 통해 지원한다. 지원 대상은 금융감독원과 채권은행이 실시하는 신용위험평가에서 B등급을 받은 곳 가운데 신청을 받아 선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