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표의 기원은 2500년 전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들로 거슬러 올라간다. 시민의 직접투표로 지도자를 선출했고 도자기 조각(陶片)에 이름을 써넣는 비밀투표식 도편추방제로 위험인물을 추방하기도 했다. 하지만 투표권은 성인 남자 자유민에 한정돼 오늘날 투표와는 차이가 크다.

현대의 보통·평등·비밀·직접투표라는 4대 원칙이 확립된 것은 그리 오랜 일이 아니다. 18~19세기 유럽에선 시민혁명으로 일반 시민도 투표권을 갖게 됐지만, 여기서 ‘시민’에 여성은 제외됐다. 계몽사상가인 장 자크 루소조차 “여성은 남성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 창조됐다”고 했던 시대다.

남녀가 동등한 투표권을 갖는 보통선거는 20세기 들어와서다. 뉴질랜드(1898년), 호주(1902년)에 이어 영국이 1918년, 독일이 1919년, 미국이 1920년 각각 여성 투표권을 허용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여성을 군수산업에 동원한 데 따른 당근인 셈이다. 반면 혁명의 진앙지였던 프랑스는 정작 1946년에야 여성에게 투표권을 줬다.

평등투표 원칙은 1인1표, 즉 투표의 등가성 원칙을 의미한다. 하지만 20세기 초만 해도 납세액 등에 따라 투표권이 달라지는 불평등 투표가 적지 않았다. 프로이센(독일)에선 투표권자를 납세액에 따라 3등분해 투표하게 했는데, 총세수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고액납세자 그룹에서 유일한 투표자인 알프레드 크룹(철강회사 크룹 창업주)의 1표가 중간납세자나 소액납세자 그룹의 수많은 사람들 표와 동일하게 간주됐다.

비밀투표는 1858년 호주에서 처음 도입돼 호주식 투표라고 부른다. 호주는 정당한 이유없이 투표를 안 하면 벌금을 물리는 강제투표제를 시행하고 후보자에게 선호 순위를 매겨 투표하는 보다(Vorda) 투표를 채택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1948년 정부수립과 함께 투표의 4대 원칙이 한꺼번에 도입됐다. 초등학생 때부터 배우는 민주주의의 기본원칙이다. 그런데 서울중앙지법이 최근 통합진보당의 19대 국회 비례대표 후보 경선 때 대리투표를 한 당원 45명에게 무죄를 선고해 논란이다. 재판부는 직접투표가 공직 후보자를 뽑기 위한 당내 경선에도 반드시 적용돼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봤다.

현행 공직선거법에선 신체 장애인이 가족이나 본인이 지정한 2명을 동반한 경우에 한해 대리투표를 허용하고 있다. 다만 정당의 경선에 대해선 공직선거법에 관련 조항이 없다. 그러나 국민의 세금 지원을 받는 공당의 대리투표가 무죄라는 것이니 놀랄 일이다. 이런 식이라면 법에 없는 초·중·고 반장 선거도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는 말이냐는 비판도 제기된다. 대리투표를 대리운전으로 착각한 건 아닌지….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