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림동 한경갤러리에 전시된 재미화가 최동열 씨의 ‘누드, 그리고 안나푸르나’.
서울 중림동 한경갤러리에 전시된 재미화가 최동열 씨의 ‘누드, 그리고 안나푸르나’.
“2010년 봄 네팔에서 안나푸르나 산맥을 돌아다니다 베이스캠프인 촘롱마을(2100m)에 짐을 풀고 작업할 때였어요. 밤새 눈보라 치는 동굴 암자 침실에서 자고 아침에 눈을 떠 보니 내 앞에 펼쳐진 안나푸르나의 얼굴이 마치 신령님처럼 다가오더군요. 산에는 영적인 것이 뭉쳐 있는데 히말라야는 그게 특히 강했어요.”

재미화가 최동열 화백(62·사진)은 지난 3년 동안 히말라야에 푹 빠진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매년 두 차례 히말라야에 2~3개월씩 머물며 하얀 능선을 화폭에 담아 왔다.

한국경제신문이 창간 49주년을 기념해 14~24일 한경갤러리에서 최 화백의 초대전을 연다. ‘히말라야를 품다’를 주제로 한 이번 전시에서는 촘롱마을을 비롯해 칸첸중가 종그리, 안나푸르나를 등정하며 그린 유화, 밀랍 조각 등 20여점을 선보인다.

뉴욕과 서울을 오가며 활동하는 최 화백은 ‘한국의 고갱’으로 불리는 작가. 산과 꽃, 누드, 도심 빌딩을 소재로 자연과 도시문명의 접점,동서양 문화의 경계를 깊숙하게 짚어왔다. 밖에서 안을 보는 동양화의 전형적 구도에서 벗어나 안에서 밖을 보는 구도를 통해 ‘안팎의 하모니즘’이란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

그는 다양한 생물과 초목이 공존하는 자연(히말라야)과 인간(누드) 사이에 내재하는 원천적인 에너지에 주목한다. 그림에는 자연스럽게 구상과 추상이 교차한다. 등만 보인 누드엔 수줍음보다 당당함이 있고, 흰색과 원색을 대비시킨 화면엔 원시적이고 주술적인 기운이 감돈다.

“단순히 웅장한 자연을 담아낸 풍경화에서 끝나지 않고 안나푸르나와 칸첸중가, 마체푸츠레봉을 바라보는 여인의 누드를 그려넣어 좀 더 신비롭고 장엄하게 느낄 수는 없을까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지난봄 인도 잔스카에서 텐트를 치고 작업했다는 최 화백은 “한국 산이 예쁘고 둥근 데 비해 히말라야는 날카로움과 장엄함 그 자체”라며 “히말라야의 깊숙한 산속에서 스스로 강렬한 청년으로 돌아온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자연과 인간의 접점을 포착하는 최 화백의 작업에는 극적인 인생 경험이 녹아 있다. 그의 할아버지는 일제 때 민족대표 33인을 변호했던 국내 1호 변호사 최진, 할머니는 소설가 나도향의 누나이자 국내 최초 피아니스트였다. 부친은 국내 최초로 슬롯머신을 도입했다.

그는 경기중을 졸업하고 검정고시로 고교를 건너뛴 수재였다. 15세에 한국외대 베트남어과에 입학해 2학년 때 해병대에 자원해 월남으로 떠났다. 해병 첩보부대(HID)에 근무하며 전쟁의 잔인함을 체험한 시기였다. 22세에 미국으로 간 그는 ‘글쟁이’의 꿈을 키우던 1977년 영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배경이 됐던 뉴올리언스의 풍광을 보러갔다가 추상화가인 아내 로렌스를 만나 미술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림이 글보다 자유롭다는 것을 알고는 독학으로 그림 공부를 시작했다.

“이미 만들어지고 결정된 대로 인생을 사는 것은 재미가 없어요. 삶이란 만들어 가는 과정이 있어야 의미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히말라야는 제 인생의 ‘멜팅 포트’(용광로) 같은 것입니다.” (02)360-4114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