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49주년 - 기로에 선 신흥국…20억 시장을 가다] 새로운 오스만제국 가능성 있지만
 포스코 이즈미트 공장
포스코 이즈미트 공장
지난 1일 터키 이스탄불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반가량 달려 도착한 포스코 이즈미트 공장. 연간 20만t의 스테인리스강 생산능력을 갖춘 이 공장은 지난 7월 가동을 시작했다. 창고처럼 생긴 공장 문을 지나자 족히 수천개는 돼 보이는 핫코일이 바닥에 수북이 쌓여 있었다. 천장에선 육중한 크레인 여러 대가 핫코일을 공장 이곳저곳으로 들어 옮기는 작업을 반복하고 있었다. 공장 한쪽에선 핫코일을 눌러 두께를 얇게 만드는 압연 작업이 한창이었다. 이영택 영업본부장은 “가전제품이나 주방용품에 쓸 수 있을 만큼 얇은 강판을 만드는 중”이라고 설명했다.

이 공장은 가동 당시부터 포스코의 첫 유럽 공장이자 터키 최초 스테인리스 생산시설로 현지 언론에서도 화제가 됐다. 하지만 이 공장만큼 터키 경제의 잠재력과 한계를 동시에 엿볼 수 있는 곳도 드물다.

터키의 강점은 익히 알려진 대로 유럽과의 지리적 근접성, 인구 7500만명의 커다란 내수시장, 풍부한 노동인구 등이다. 여기에 정치적 안정과 주변국과의 관계 개선으로 해외 자본이 터키에 밀려들었고 덕분에 최근 10년간 경제도 급성장했다. 터키의 부상을 16~17세기 대제국을 건설한 오스만제국에 빗대 ‘새로운 오스만제국’으로 묘사하는 외신도 있다.

포스코의 터키 현지 공장 설립도 이런 측면을 두루 감안한 것이다. 포스코는 이곳에 터키 키바르그룹과 함께 총 3억5000만달러를 쏟아부었다. 자금의 70%는 포스코그룹(10%는 계열사인 대우인터내셔널)이 댔다. 이 본부장은 “터키는 지리적 요충지”라며 “일단 터키 내수시장과 유럽 시장을 공략한 뒤 수익성을 봐 가며 독립국가연합(CIS), 중동, 북아프리카로 판로를 확대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현대차 포스코 등 국내 기업과 오랫동안 합작해온 알리 키바르 키바르홀딩스 대표는 “터키와 임금 수준이 비슷한 체코나 폴란드는 5~6년 뒤면 괜찮은 노동력 구하기가 쉽지 않지만 터키는 젊은 인구가 많아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고 자신했다. 포스코 이즈미트 공장의 홍승현 영업부장도 “포스코 본사와 비교할 때 이즈미트 공장의 대졸 초임은 우리 돈으로 연 2700만원 정도로 싼 편은 아니지만 생산직 초임은 1300만원 정도로 한국의 절반 이하”라고 말했다.

반면 터키의 약점은 고급 기술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스테인리스만 해도 그렇다. 터키는 세계 10위권의 조강 생산능력을 갖추고 있지만 스테인리스나 자동차 강판 같은 고급 철강은 못 만든다. 이런 고급 철강은 전량 수입해 쓰고 있다. 이즈미트 공장에서도 원재료는 한국의 포스코 본사와 이탈리아 철강업체에서 수입한다. 이즈미트 공장에서 하는 일은 압연기를 이용해 철강 두께를 얇게 만드는 단순가공뿐이다.

터키 입장에선 자국 내에 스테인리스 공장이 가동됨에 따라 일부 수입대체 효과를 노릴 수 있지만 원재료를 100% 수입하는 만큼 경상수지 개선에 별 도움이 안 된다. 장래 기술 발전을 기대하기도 어렵다. 합작사인 키바르그룹의 실질적인 경영 참여도 없고 기술이전 계약이 된 것도 아니다. 정성태 LG경제연구원 책임연구원은 “현지기업이 일종의 통행세만 받는 셈”이라고 평가했다.

포스코 공장 바로 옆에 있는 현대차 이즈미트 공장도 상황은 비슷했다. 현대차 이즈미트 공장의 올해 생산목표는 10만대를 조금 넘는 수준. 이 중 90%를 유럽에 수출한다. 1997년부터 가동을 시작했지만 아직까지 단순 조립공장 역할밖에 못 하고 있다. 자동차 엔진 등 주요 고부가가치 부품은 전량 수입한다. 기술 이전도 없고 디자인이나 설계도 현대차가 도맡아 하고 있다. 도요타 포드 르노 닛산 등 글로벌 기업들도 터키 주요 공업지역에 있지만 사정은 대동소이하다.

[창간 49주년 - 기로에 선 신흥국…20억 시장을 가다] 새로운 오스만제국 가능성 있지만
터키 정부는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최근 현대차를 비롯해 외국 자동차 업체에 엔진 공장 건립을 요청했지만 헛수고였다. 한때 터키 굴지의 그룹에 고유 브랜드가 달린 ‘국민차’ 생산 의사를 타진하기도 했다. 하지만 해당 그룹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고 한다. 진병진 현대차 이즈미트 공장장은 “터키 업체가 후발주자로 뛰어들기엔 너무 늦은 감이 있다”며 “터키 정부도 중화학 산업을 키우지 않은 것을 몹시 후회하고 있다”고 전했다. 하지만 3년 가까이 터키에 근무한 옥종수 KOTRA 이스탄불 무역관 차장은 “터키에는 상인 정신만 있지 기업가 정신은 없다”고 꼬집었다.

터키 정부가 공격적으로 산업 발전을 지원하기도 쉽지 않다. 재정 사정이 호락호락하지 않아서다. 재정적자가 거의 매년 이어지고 있는 데다 지하경제 비중이 국내총생산(GDP)의 40% 이상으로 추산될 만큼 세수 기반이 허약한 게 터키의 현실이다. ‘새로운 오스만제국’이 등장하기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이스탄불·앙카라·이즈미트=주용석 기자 hohoboy@hankyung.com

공동기획한경·LG경제연구원

■특별취재팀

브라질=남윤선 기자, 박래정 LG경제硏 수석연구위원 인도네시아=김보라 기자, 이지선 선임연구원 멕시코=노경목 기자, 김형주 연구위원 터키=주용석 차장대우, 정성태 책임연구원 인도=이정선 차장대우, 강선구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