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국내 한 패션업체의 A사장을 만났을 때 일이다. 그가 팔을 움직일 때마다 셔츠 사이로 살짝살짝 파네라이 시계 특유의 디자인이 눈에 들어왔다. “파네라이를 차셨네요”라고 말하자 그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파네라이를 아세요? 전 파네라이 시계를 여러 개 갖고 있는데 이건 제일 처음 구입한 모델이에요. 파네라이를 갖고 있는 남자들끼리는 마치 친구같은 특별한 동질감을 느끼죠.”(웃음)

동질감은 ‘파네리스티’라는 커뮤니티를 통해 형성된다. 파네라이 시계를 좋아하는 이들의 자발적 모임이다.

이처럼 충성도가 높은 마니아층을 갖고 있다는 게 파네라이만의 돋보이는 특징이다. 파네리스티가 형성된 것은 인지도를 넓히기 시작한 2000년이다. 인터넷 홈페이지(www.paneristi.com)를 기반으로 활동하고, 지역별로 오프라인 모임도 수시로 이뤄진다.

파네리스티의 회원 수가 공식적으로 집계된 적은 없다. 전 세계 회원이 수만 명에 달하고, 한국에도 수백 명이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안젤로 보나티 파네라이 회장은 “파네리스티가 자발적 모임인 만큼 회사에선 이들의 활동에 전혀 관여하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소비자의 자율성을 존중한다는 것이다.

파네리스티에서 회원들은 파네라이의 모든 것에 대해 ‘난상토론’을 벌인다. 새로 나온 제품 디자인이나 기술에 쓴소리를 쏟아내기도 한다. 명품시장에서 비슷한 사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독특한 모임이다.

열성적이면서, 때론 비판적인 지지자들이기도 한 파네리스티는 이 브랜드에 소중한 ‘자산’임에 틀림없다. 파네라이는 2010년 파네리스티 결성 10주년을 기념하는 한정판 제품을 내놓기도 했다.

파네라이 매장
파네라이 매장
명품 브랜드가 선택할 수 있는 전략은 둘 중 하나다. 가능한 한 많은 소비자를 공략해 대중성을 확보하느냐, 아니면 소수의 초우량고객(VVIP)을 꽉 잡느냐다. 명품시계 시장에서 최근 떠오르는 신흥주자로 꼽히는 ‘파네라이’는 후자 쪽을 택한 경우다.

깔끔하면서도 강인한, 남성적 디자인이 특징인 파네라이는 열혈 마니아를 거느린 대표적 명품으로 통한다. 오랜 세월 동안 심해 탐험용 시계를 제작하며 바다와 인연을 맺어온 브랜드다. 지중해에서 시작한 ‘남자의 시계’라는 DNA를 100년 넘게 지키며 다른 브랜드에선 찾아볼 수 없는 파네라이만의 스타일을 선보이고 있다.

●지중해에서 탄생한 명품시계

파네라이는 1860년 창업자 지오바니 파네라이가 이탈리아 피렌체 에 첫 매장을 열면서 탄생했다. 파네라이 시계 역사의 전환점이 된 것은 1936년. 이탈리아 해군에 군사용 방수 시계를 납품하면서다. 이탈리아는 우리나라처럼 삼면이 바다여서 해군의 역할이 그만큼 중요한 나라다. 당시 해군은 파네라이에 “깊은 바다에서도 잘 작동하는 방수 시계를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여러 명의 시계 제작자가 만든 제품들이 시험 대상에 올랐지만 장시간 수중작업을 수행하는 특수부대원에게 적합하다고 판정받은 시계는 파네라이 하나뿐이었다. 이 시계가 세계 최초의 군사용 방수시계이자 오늘날까지 파네라이의 간판 제품인 ‘라디오미르’다. 지름 47㎜의 큼직한 케이스와 야광으로 된 시간 표시 등 라디오미르의 정체성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군사용 출발…1993년 민간용 출시

군사용인 만큼 시계는 무엇보다 튼튼해야 했다. 파네라이의 제품은 더욱 견고하게 진화했다. 1940년대 이후 러그(케이스와 시곗줄을 잇는 부분)를 케이스와 일체형으로 만들고, 시계에서 제일 약한 부분인 크라운(용두)을 보호하는 브리지를 추가하는 등 내구성을 높이기 위한 새로운 시도가 이어졌다. 견고하게 만들기 위해 시작한 이런 독특한 시도는 현대적 아이콘으로 진화하면서 파네라이의 상징이 됐다.

1993년 파네라이는 ‘민간용’ 시계를 처음 내놨다. 냉전 장벽이 무너지고 군사용 시계 수요가 줄면서 변화가 필요했던 시기다. 1997년에는 세계적 명품그룹인 스위스 리치몬트에 인수됐고, 이듬해 해외 진출을 시작하면서 도약의 기반을 다졌다. 파네라이가 리치몬트에 인수된 데는 배우 실베스터 스탤론의 공(?)이 컸다고 한다. 스탤론은 이탈리아에서 영화 ‘데이라이트’를 촬영할 당시 이 시계를 접하고 파네라이의 열혈팬이 됐다. 그는 파네라이 시계를 지인에게 선물했고, 당시 리치몬트 회장이 이 제품을 접한 것을 계기로 인수가 성사됐다는 후문이다.

●시곗줄만 바꿔도 전혀 다른 시계로

파네라이는 이탈리아의 디자인과 스위스의 시계 기술이 결합한 명품시계다. 마케팅을 총괄하는 본사는 이탈리아에 있고, 시계 제작과 물류는 스위스에서 맡고 있다. 2002년 스위스 뇌샤텔에 새 매뉴팩처(시계를 만드는 공방)을 세워 제조 전 과정을 완벽하게 관리할 수 있게 됐다. 2005년부터는 자체 개발 무브먼트(시계의 핵심 부품인 동력장치)를 출시했으며, 후속 무브먼트를 꾸준히 내놓으면서 비중을 끌어올리고 있다.

파네라이 시계를 차는 쏠쏠한 재미는 ‘줄질’에 있다. 줄질은 스트랩(시곗줄)을 자유자재로 교체하는 것을 말한다. 이 시계를 사면 줄을 교체하는 데 쓰는 드라이버와 세컨드 스트랩(교체용 시곗줄)을 기본으로 준다. 또 색상과 디자인이 각각 다른 수백 종의 공식 스트랩을 따로 판매하고 있다. 시곗줄만 바꿔도 전혀 다른 시계를 차는 듯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가장 저렴한 엔트리(입문용) 제품은 600만원대부터 시작한다. 국내에선 1000만~2000만원대 제품이 제일 많이 팔린다. 하이 컴플리케이션 워치(여러 기능을 넣은 최고급 시계)는 2억원을 넘기도 한다.

임현우 기자 tardi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