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호 칼럼] '국민석유' 뒷감당 어떻게 하려고…
남태평양에 위치한 가상의 왕국 유토피아다. 이 나라 왕 파라마운트는 서구문물에 관심이 많다. 유학을 마친 맏딸 자라 공주가 6명의 영국 신사와 함께 귀국하는데 그중 한 사람이 주식회사법을 소개한다. “주식회사로 영국도 살 수 있습니다.” 왕은 서둘러 법을 공포하고, 국민은 새로운 제도에 환호한다. 아이들까지 사업계획서를 들고 다니더니 국민 모두가 주주가 됐다. 결과는 어땠을까. 나라는 혼란에 빠졌고, 왕은 법을 되돌리고 영국인들을 감옥으로 보낸다.

1893년 런던에서 막을 올린 오페레타 ‘유토피아주식회사(Utopia, Limited)’다. 유한책임제도로 주식회사 제도가 힘을 얻으면서 모두가 묻지마 투자에 열광하던 세태를 풍자한 작품이다. 주식회사가 모두를 부자로 만들어줄 것이라는 합창에 245회 연속 공연도 무리는 아니었던 듯싶다.

그 유토피아주식회사가 120년이 지난 지금 우리 눈앞에 살아나 논란이 되고 있다. 공연이 아니다. 실제 회사가 설립돼 대규모 유상증자에 나선 것이다. 국민석유주식회사다. 1000억원의 자금을 공모한 뒤 휘발유를 리터(L)당 200원 싼값에 팔겠다는 바로 그 회사다.

믿을 만한 구석은 없다. 증자를 위해 제출한 증권신고서부터가 그렇다. 주당 평가액은 마이너스 3만8914원인데, 유상증자는 주당 5000원에 하겠다고 한다. 횡령·배임 가능성에도 내부 통제장치는 없다. 회사를 해산할 수도 있지만 투자금은 보장할 수 없다. 아이들 장난도 아니고 이게 무슨 웃기는 소리인지. 투자 위험을 충분히 알렸으니 승인할 수밖에 없다는 금융감독원의 책임 회피 역시 코미디이긴 마찬가지이지만 말이다.

전문가들 모두가 터무니없다고 입을 모으는 일이다. 국민석유의 주장대로 캐나다산이나 러시아산 휘발유를 들여온다 해도 가격을 낮출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전문성이나 기술력, 자본력 모든 것이 부족한 사람들이 하는 얘기다.

따지고 보면 정부가 탄생시킨 기형적 산물이다. ‘참 묘한 기름값’이라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한마디에 정유사는 제 뱃속만 채우는 부도덕한 기업으로 낙인찍히고 말았고 그 사이 정부 개입으로 기름 시장의 질서는 엉망이 됐다. 그 틈바구니를 비집고 등장한 순박한 아이디어가 소비자가 주주가 되는 정유사인 것이다.

사실 따져 보자. 정부가 얼마나 위험한 짓을 했는지. 알뜰주유소부터가 그렇다. 국정감사 자료를 보면 대부분이 알뜰주유소인 고속도로 주유소의 기름값이 주변 일반 주유소보다 높다. 알뜰주유소와 전국 주유소 평균 가격의 차이는 지난해 19원에서 올해는 4원으로 축소됐다. 예산은 300억원이 넘게 투입됐는데 기름값은 그대로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석유제품 전자상거래도 마찬가지다. 정부는 이 제도를 시작하면서 수입 석유제품에 엄청난 인센티브를 줬다. 관세와 수입부과금이 면제됐고, 경유에는 바이오디젤 혼합 의무도 부과하지 않았다. 1년 사이 1조원의 석유류 무역 흑자가 날아갔고, 일본 정유사와 수입상만 배가 불렀다. 하지만 이 제도가 기름값 인하로 이어졌다는 증거는 찾을 수 없다.

주유소 혼합판매도 그렇다. 특정 정유사에 전속된 주유소라고 해도 일정 분량은 다른 정유사에서 받을 수 있도록 해 궁극적으로 기름값을 내리겠다는 제도인데, 시행 1년이 지났지만 성과는 제로다.

그 사이 주유소들은 줄줄이 문을 닫고 있다. 올 들어 휴·폐업한 주유소가 700곳이 넘는다. 정유사가 망했을 리 없다. 자영업자들만 퇴출되고 있는 것이다. 세금을 꼬박꼬박 걷어가는 정부만 여전할 뿐, 정유사와 자영주유소는 물론 세금을 낸 국민들까지 모두 패자가 됐다. 유류세는 그대로 둔 채 정부가 시장에 뛰어들어 분탕질을 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다. 이제 그만하는 것이 옳다.

아무 데도 없는 곳이라는 뜻이 유토피아다. 그런 유토피아주식회사가 황당한 1000억원 유상증자에 나섰다. 반(反)기업 정서를 부추긴 정부가 장밋빛 구호에 현혹된 소비자들의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는 것인지, 정말 모를 일이다.

김정호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