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유동성 위험' 기업 없다지만…일부 A급 회사채는 투기등급 취급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서 24일 열린 ‘국민행복기금 성과점검 세미나’의 관심은 세미나 내용 자체보다는 축사를 하기 위해 참석한 신제윤 금융위원장의 동양 관련 발언이었다. 동양사태 이후 시장에선 다른 그룹의 유동성에도 문제가 생기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이 팽배해 있어서다. 신 위원장은 세미나 참석 후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다른 기업에 대한 우려는 시장에서 과장된 것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금융위 관계자는 “동양의 법정관리 신청이 회사채 시장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하다”고 진단했다.

신 위원장의 발언은 금융당국 수장으로서 일종의 ‘구두 개입’을 통해 지나친 불안심리를 진정시키려 한 것이라는 분석이다. 일부 기업의 회사채가 시장에서 투기등급에 거래되는 등 시장 불안 요인이 잠재해 있기 때문이다.

◆금융당국, “우려할 상황 아니다”

신 위원장의 발언에 대해 전문가들은 다른 대기업으로 동양사태의 여파가 불필요하게 전이되는 것을 차단하려는 의도로 해석하고 있다. 지난 18일 최수현 금융감독원장이 국정감사에서 ‘동양처럼 계열 증권사를 통해 CP와 회사채를 판매한 곳이 얼마나 되느냐’는 질문에 ‘4곳 정도’라고 답한 이후 시장에선 A그룹이니 B그룹이니 하며 말이 많았다. 금융위 관계자는 “금감원장이 동양처럼 위험하지 않다고 했는데도 불안심리가 확산된 만큼 우려가 크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었다”고 말했다.

회사채 발행 시장에는 이상 조짐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게 금융위의 판단이다. 올 들어 회사채 발행이 전반적으로 위축된 건 사실이다. 9월 말까지 발행액은 41조5000억원으로 작년 동기 52조9000억원보다 10조원 이상 줄었다. 하지만 이는 동양사태의 여파라기보다 은행채가 순발행 기조로 바뀌었기 때문이라는 진단이다. 금융위의 다른 관계자는 “은행채가 회사채의 대체재이기 때문에 시장에서는 은행채가 나오면 같은 등급일 때는 회사채보다 선호한다”며 “회사채 발행이 감소한 이유를 동양사태 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금융위는 또 ‘BBB 이하 등급’ 회사채에 대한 기피 현상은 올해만의 문제가 아니며 회사채 시장의 양극화가 동양사태를 전후로 심화되고 있다는 근거도 찾을 수 없다고 말한다. 올 들어 A등급 회사채는 순상환 기조로 돌아섰고, 동양사태가 불거진 10월 들어 넥센타이어(1000억원) 대웅제약(400억원) 한솔제지(1600억원) 등이 모두 A등급 회사채를 예전보다 낮은 금리로 발행하는 데 성공했다는 얘기다.

◆“시장 불안요인은 여전히 잠복 중”

금융당국이 큰 우려가 없다고 강조하고 있지만 일부 회사채가 투기등급 금리에 거래되는 등 불안요인이 나타나고 있다. 이날 한 증권사가 보유 중이던 한진해운 71-1회 채권 액면 31억원어치가 장외시장에서 다른 증권사에 헐값에 매각됐다. 거래 가격은 액면 1만원당 평균 9717원으로 떨어졌다. 이를 잔존 만기가 8개월인 점을 감안해 금리로 환산하면 연 9.8%다.

이 같은 거래금리는 투자등급 중 가장 낮은 ‘BBB-’ 회사채 평가금리 평균(1년 만기)인 연 6.3%를 크게 웃돈다. 한진해운의 현재 신용등급은 ‘A-’다. 기관 간 거래금리는 보통 ‘벤치마크(기준)’ 역할을 한다. 개인투자자와 달리 거래 단위가 크고, 시장 위험을 더 객관적으로 반영하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한진해운 회사채를 판 증권사가 긴급히 돈이 필요했을 수도 있겠지만, 거래 금리가 높아진 것은 시장의 불안감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는 의미”라고 해석했다.

류시훈/이태호 기자 bad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