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절은 권력투쟁의 포장일 뿐
백성 입장에선 별것 아닐 수도
서정문 < 한국고전번역원 수석연구위원 >
자객열전에 올라 있는 예양은 주군이 죽고 나라도 없어졌는데, 끝까지 주군을 위해 복수를 하려다 자신도 죽는다. 설사 복수를 위해서라도 거짓 충성을 바쳐서는 안 된다고 한 예양은 영원한 충절의 아이콘이 됐다. 관중은 다르다. 자기가 섬기던 주군을 죽인 환공 밑에서 벼슬길에 올랐다. 비록 환공을 춘추오패의 한 명으로 만들고 제나라를 중흥시켰지만, 주군을 죽인 환공의 재상이 된 것은 문제였다. 그러나 공자는 무력을 쓰지 않고도 제후를 규합했으니 관중이야 말로 인(仁)이라며 필부필부의 작은 의리와는 차원이 다르다고 했다. 백성이 지금까지 그의 혜택을 입고 있다고 높이 평가했다. 군신의 관점이 아니라 백성을 바라보는 입장에서 말한 것이다.
하루는 김종직이 성삼문을 충신이라고 말하니, 성종의 낯빛이 변했다. 이때 김종직이 “신은 전하의 성삼문이 되겠습니다”라고 하자 풀렸다고 한다. 이를 보면 김종직의 마음에는 현실에 대한 의지와 충절에 대한 마음이 모두 존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예양도 되고 싶고, 관중도 하고 싶은 것이다. 출세를 이익으로 본다면 허균의 말이 맞겠지만, 경세의 포부로 본다면 둘이 같이 존재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
사실 충절이란 왕조의 유지에 필요한 덕목이지, 백성을 위한 관점은 아니다. 백성 입장에서 보자면 충절은 권력 투쟁을 싸놓은 포장지와 다름이 없다. 오히려 백성을 편케 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왕조시대라면 모르겠지만, 지금까지도 여전히 김종직에게 충절을 요구하는 것은 김종직만큼도 인식이 분화되지 못한 것이다. 더욱이 그를 포용했던 성종의 생각에는 한참 못 미치는 것이 아닐까.
서정문 < 한국고전번역원 수석연구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