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데스크] '샤워실의 바보' 같은 전력당국
‘2023년부터 EDF 컨소시엄에 현행 전기요금(도매가격)의 두 배 수준인 ㎿h당 92.50파운드를 보장한다. 92.50파운드를 밑돌 경우 정부가 그 차액을 메워준다. 반대로 전기요금이 92.50파운드를 넘어선다면 컨소시엄이 웃도는 만큼을 정부에 돌려줘야 한다. 이 계약은 2023년부터 35년간 적용된다.’

무슨 첨단 파생상품 거래 같다. 지난달 영국 정부가 프랑스 에너지업체인 EDF 컨소시엄과 맺은 영국 남서부 힌클리포인트 원자력발전소 건설계약 내용이다. 30년 만에 원전을 새로 짓기로 하면서 왜 이런 계약을 했을까.

원전 대안도 원전이다

영국 정부는 우선 재정지출 부담이 없을 것으로 판단했다. 힌클리포인트 원전 건설에는 160억파운드가 투입될 예정인데 모두 EDF 컨소시엄이 조달해야 한다. 영국 정부는 컨소시엄의 조달 자금 60%에 지급보증만 서주면 된다. 2023년부터 전기요금이 92.50파운드를 밑돌 때 EDF 컨소시엄에 보장해주기로 한 재원은 전기 소비자들로부터 걷는 에너지세에서 충당하기로 했다.

특히 눈여겨볼 대목은 원전에 대한 영국 정부의 인식과 정책 실행력이다. 영국 정부는 2003년 발표한 에너지백서를 통해 원전 건설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국민을 설득했다. 2008년엔 원자력백서를 발표해 신규 원전 건설을 허용하겠다는 의지를 확고히 했다. 한때 지속적인 원전 건설 여부를 놓고 고심하던 모습과는 달랐다.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여파에도 흔들리지 않고 원전 건설을 선택한 첫 번째 이유는 뛰어난 경제성이다. 천연가스와 석탄을 연료로 사용하는 화력발전과 풍력 태양광 등 신재생에너지에 비해 워낙 발전단가가 저렴해 원전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EDF 컨소시엄에 두 배 높은 전기가격을 보장해주더라도 장기적으론 원전이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이기도 하다. 야당인 노동당과 파이낸셜타임스 등 언론이 신규 원전 건설에 반대하지 않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거꾸로 가는 원전정책

한국은 2008년 이명박 정부 시절 2030년까지 25%인 원전 비중을 41%(설비용량 기준)로 끌어올린다는 1차 국가에너지기본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는 민관 실무그룹의 2차 국가에너지기본계획 권고안에 따라 2035년까지 이를 22~29%로 낮출 가능성이 크다. 대신 천연가스와 석탄 화력발전 비중을 높인다는 복안이다.

정부가 5년 만에 원전 공급확대 정책을 전면 수정하는 데는 반핵단체 등 시민단체 목소리가 크게 작용했다. 1차 계획 때와 달리 2차 계획에서는 시민단체를 초안작성 때부터 포함시켰기 때문이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와 잇단 원전 비리로 높아진 원전 불안감이 반영됐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불안 요소는 일관성과 국민 신뢰를 잃은 정부 정책이다. 2008년 11월 정부는 부산항 광양항 인천항 평택·당진항 총 172기 크레인의 동력원을 경유에서 전기로 바꾸라는 행정지도를 했다. 당시 국제 석유가격이 치솟자 에너지 절감대책의 하나로 선택한 근시안적 정책이었다. 이는 전기크레인을 최근 3년간 전력난 때 ‘전기먹는 하마’로 돌변시키는 폐해를 초래했다.

에너지 백년대계가 제2의 전기크레인이 돼선 곤란하다. 바보는 샤워실에서 냉수와 온수를 번갈아 틀기만 하다가 결국 샤워를 망치게 된다.

김홍열 경제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