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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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유명 사립대에 재학 중인 이모씨(24)는 지난 9월부터 수업 중에 계속 걸려오는 전화로 골머리를 앓았다. H카드 직원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뒤 “어머니 연락처를 아느냐”고 묻더니 “어머니가 1000만원의 카드빚을 갚지 않고 있는데 경우에 따라 구속될 수 있다”고 윽박질렀다. 어린 시절 이혼하고 떠난 어머니와 연락이 닿지 않는다고 했지만 카드사 직원은 막무가내였다. 이씨는 이달 초 또 전화를 걸어온 직원에게 “녹음했다.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말하자 더 이상 연락이 오지 않았다.

금융권에서 돈을 빌렸다가 갚지 못한 금융채무 불이행자가 100만명을 훌쩍 넘었다. 이들의 채무 금액만 올해 서울시 예산(24조원)의 6배와 맞먹는 142조원(8월 말 기준)에 이른다. 대부업체 입장에선 대출금 환수 여부에 사활이 달리게 됐다. 전문업자에게 채권 추심을 의뢰해 채무자에게 우편독촉장을 보내거나 수시로 독촉 전화를 하는 등 전쟁을 벌이는 이유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벌어지는 과도한 추심행위다. 합법적 틀을 벗어난 사례가 계속 늘고 있어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끊이지 않는 불공정 채권추심

8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채권추심 관련 민원은 해마다 2000건이 넘고 올해 상반기에만 1554건에 달했다. 경찰청에 따르면 불법대부업·채권추심 관련 범죄도 2010년 2541건, 2011년 4423건, 2012년 6535건으로 2년 새 2.6배 증가했다. 불법채권추심 범죄는 2010년 153건에서 지난해 823건으로 다섯 배 이상 늘었다.

금감원은 불법 추심을 막기 위해 지난 7월 ‘채권추심업무 가이드 라인’을 마련해 대부업체 등 금융사에 전달했다. 금융회사별 협회와 중앙회 등을 통해 이행 실태를 이달까지 전면 점검한다는 방침이다. 이 같은 감독 강화 조치는 그러나 공염불에 그칠 공산이 크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채무자 보호를 위해 2009년 마련된 ‘반복성’ 요건 규정이 애매해 불공정 채권추심 행위를 부채질하고 있어서다.

불공정 추심행위는 불법 대부업체에 그치지 않는다. 서울중앙지검 금융조세조사1부는 H저축은행이 사채업자에게 뒷돈을 주고 채권 추심 업무를 맡긴 혐의로 수사하고 있다. 검찰은 “현재까지 임직원 개인비리에 중점을 두고 조사 중이지만 불법 채권추심 행위가 드러날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법률 개정이 불법추심 면죄부?

불공정 채권추심 행위에 대한 처벌이 강화된 2006년에서 2008년 초에는 집에 찾아와 빚을 독촉하거나 자식 또는 부모에게 대리변제를 강요하는 사례는 주춤했다. 오히려 남아 있는 불법추심을 뿌리 뽑겠다며 2009년 도입한 법률이 맹점을 드러내면서 채권자가 밤늦게 집에 찾아오거나 직장동료, 친구들에게 채무사실을 알리는 등의 악질적인 추심이 되살아나고 있다. 2009년 8월 시행된 ‘채권의 공정한 추심에 관한 법률’은 부당·불법 채권추심 행위에 대해 ‘반복적으로 또는 야간(오후 9시 이후~다음날 오전 8시)에’라는 단서 조항을 달았다.

서영교 민주당 의원(서울 중랑갑)은 “이 법률 시행으로 주간에 한두 번쯤 집이나 직장으로 찾아가 채권 추심하는 게 가능해졌다”며 “반복적인 채권추심 행위가 있더라도 입증이 쉽지 않아 처벌조차 어렵게 됐다”고 설명했다. 서 의원은 “배우자 등에게 대리변제를 강요하는 행위 등도 ‘반복성’을 입증할 책임이 채무자에게 있어 형사처벌이 어려워진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전법(대부업의 등록 및 금융이용자 보호에 관한 법률 등)에는 대부업자나 금융회사 등이 정당한 사유 없이 집이나 직장으로 찾아와 빚 독촉을 하거나 배우자 등에게 대리변제를 강요하는 것 등은 그 자체로 처벌 대상이었다.

고영재 강남경찰서 수사과장은 “채권추심 업자가 은근하고 교묘하게 반복성 조건을 악용할 가능성이 있다”며 “채권자가 폭력·협박 등의 다른 불법적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채무자에게 은근한 압박으로 고통을 주는 경우 불법성 판단이 애매해질 소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금융권 관계자도 “반복성 문구는 채권자에게도 혼란을 불러올 수 있어 구체적으로 명시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법무부는 이 같은 허점을 보완하기 위해 지난 9월29일 직장 등 여러 사람이 모인 장소에서 채무사실을 알리는 행위 등에 대해 3년 이하의 징역이나 3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하는 내용의 ‘채권의 공정한 추심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4년 만에 재수정안…‘채무자 보호’ vs ‘도덕적 해이’

불법 추심이 끊이지 않자 서영교 의원 등 22명은 ‘채권의 공정한 추심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지난해 12월 국회에 제출했다. 골자는 ‘반복성’ 문구를 삭제하고 채무자가 변호사를 선임해 채권추심자와 채무상환 문제를 다루도록 하는 ‘채무자 대리인 제도’ 도입이다.

개정안은 올해 초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위원회를 통과했지만 6월 법사위 전체회의를 통과하지 못해 1년째 계류 중이다. 새누리당 일부 의원과 신용정보협회·은행연합회 등이 강하게 반발하고 있어서다. 김평섭 은행연합회 여신제도부장은 “법률 자체의 취지가 채무자 권리 보호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반복성에 대한 책임 여부는 사법부 판단에 맡기면 된다”며 ‘반복성’ 문구 삭제에 반대했다. 고보경 변호사는 “법이 채무자의 권리 보호에만 초점이 맞춰지면 채무자가 법을 채무 회피 수단으로 악용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채무자대리인 제도도 의견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양기진 전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채무자 대리인 제도를 활용하는 것을 막을 근거는 없다”며 “외국 제도를 도입하는 만큼 한국 현실에 맞게 조정하면 문제될 게 없다”고 말했다. 반대 측은 정당한 채권 추심 행위를 어렵게 하고, 채무자를 도덕적 해이에 빠뜨릴 수 있다고 반발하고 있다. 금융채무 불이행자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채무자의 상환 의지를 약화시키는 등 부작용이 클 수 있다는 지적이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채무불이행자 신규 등록인원은 2010년 말 25만7647명에서 2011년 말 30만5301명, 2012년 말 36만7808명으로 증가세다.

이지훈/박상익/정소람 기자 liz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