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구호 제일모직 전무(왼쪽)와 윤성주 국립무용단 예술감독이 창작무용 ‘묵향’을 함께 제작한 과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국립극장 제공
정구호 제일모직 전무(왼쪽)와 윤성주 국립무용단 예술감독이 창작무용 ‘묵향’을 함께 제작한 과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국립극장 제공
분명 한복인데 실루엣과 색감이 묘하게 현대적이다. 흰색, 회색, 검은색, 여기에 살뜰하게 얹은 노랑과 분홍. 단순하면서도 정제된 디자인이 눈길을 끈다. 내달 6~8일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무대에 오르는 국립무용단 신작 ‘묵향’의 무용수 의상 이야기다.

과거 속 한복을 지금 이 시대로 데려온 이는 패션브랜드 ‘구호’ 디자이너인 정구호 제일모직 전무다. 지난 4월 국립무용단 ‘단’의 연출을 맡았던 그가 이번엔 윤성주 국립무용단 예술감독과 손잡고 ‘묵향’을 만든다. 이 작품에서 윤 감독은 안무를, 정 전무는 연출 의상 무대를 책임진다.

13일 국립극장에서 만난 두 사람은 다소 피곤한 듯했지만 눈빛엔 활기가 넘쳤다.

이 작품에선 ‘매란국죽’ 사군자를 소재로 군자의 덕을 절제된 몸짓으로 표현한다. 안무가이자 무용가였던 고 최현 선생의 유작인 ‘군자무’를 재창작했다. 시작과 끝, 사군자까지 총 6장으로 구성된 이번 무대는 매란국죽이 각각 상징하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을 통해 세상을 보는 군자의 시선을 담았다.

“국립무용단이 새로운 지향점을 갖고 현대적인 작품을 만들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했어요. 1970~80년대 무용계를 주름잡았던 신무용 스타일의 작품들이 지금껏 무용단이 성장하는 데 큰 자산이 됐지만 이제는 그걸 뛰어넘어야 할 시점이죠. 이 작품이 그 디딤돌이 됐으면 합니다.”(윤 감독)

현대적인 작품을 만들기 위해 꺼낸 카드가 ‘사군자’인 이유가 궁금했다. 정 전무는 “전통과 현대는 통하는 법”이라며 “전통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관객들이 여전히 현대적이고 새롭게 느낄 수 있도록 노력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전통에 시각적인 작업을 가하면 현대무용 이상으로 현대적으로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작업 내내 모든 것을 기본으로 되돌리는 일부터 했다. 윤 감독은 “한국무용 작품에서 발레나 현대무용 동작을 차용해서 쓰기도 했지만 이번엔 모두 우리 전통춤 안에서 사위를 찾으려고 노력했다”며 “단원들이 지금까지 해왔던 춤사위와 동작을 깨부수고 걸음걸이부터 호흡까지 다시 배우는 중”이라고 말했다.

정 전무는 ‘덜어내고 비우고 정리하는’ 작업에 집중했다. 그는 “우리 고유의 미학인 비움을 표현하기 위해 별다른 오브제(물체) 없이 하얀 화선지 같은 무대가 될 것”이라며 “조명도 최소화하고, 음악은 타악을 뺀 산조로만 구성했다”고 말했다.

유명 디자이너이자 대기업 임원으로서 바쁜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는 그에게서 어디서 그런 에너지가 나오는지 궁금했다. 정 전무는 “무용은 일이 아니라 오래 함께 가고 싶은 친구”라며 “친구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창의적인 작업을 계속 하고 싶다”고 말했다.

“국립무용단의 기존 작품들은 영화같이 친절했지만 이 작품은 소설 같이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스토리와 감정에만 익숙해진 관객들이 이 작품을 보면서 많은 것을 상상하고 갔으면 좋겠네요.”(정 전무)

김인선 기자 indd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