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社1병영] 공사구분 확실했던 훈련대장…내 삶의 리더십 '롤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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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병영 이야기 - 김봉건 한국전통문화대 총장
1979년 3월 해군시설장교 입대
연병장 70바퀴 구보로 체력 훈련
건축현장서 막걸리로 소통 배워
김봉건 < 한국전통문화대 총장 >
1979년 3월 해군시설장교 입대
연병장 70바퀴 구보로 체력 훈련
건축현장서 막걸리로 소통 배워
김봉건 < 한국전통문화대 총장 >
나는 1978년 대학(서울대 건축학과)을 졸업한 뒤 1년가량 공무원(당시 상공부 건축사무관) 생활을 거쳐 이듬해 3월 해군시설장교로 입대했다. 해군 특교대(OCS·해군사관후보생)는 근무기간이 상대적으로 짧고 오랜 전통이 있다는 선배들의 조언을 듣고 지망하게 됐다.
해군 특교대는 입대 후 3개월간의 훈련기간을 거쳐 소위로 임관한다. 당시 해군과 해병이 합쳐지면서 훈련도 함께 받게 됐는데 훈련 강도가 상당했다.
해군 특교대에는 기수 전통이 있었다. 특교대 70차였던 나는 입소 초기 어느 날 밤, 동기생들과 함께 연병장에 집합해 70바퀴를 돌게 됐다. 평소 운동장 몇 바퀴도 뛰지 못했던 나는 육체적인 한계에 도달함을 느끼면서 70바퀴를 뛰었고 눈앞이 노래지는 경험을 난생 처음 하게 됐다. 육체적 한계까지 몰고가는 이 같은 훈련은 강한 정신력과 함께 전우들이 같이 움직이면 평소엔 상상할 수도 없는 힘이 발휘된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해줬다. 입대 초기 경험한 엄청난 강도의 육체적·정신적 훈련은 임관 뒤 군대생활은 물론 사회생활에서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이를 헤쳐나가게 해준 잠재적 원동력이 됐다.
훈련을 마친 뒤 진해 해군시설창으로 자대 배치를 받았다. 이곳에서 시설장교로, 건축공사 설계에서부터 발주와 감독에 이르는 전 과정을 경험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해군시설학교, 해군 군수지원사령부 건물 건설 등 다양한 공사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당시 건설공사 현장은 지금에 비하면 주먹구구식이었다. 학교에서 책으로 배운 지식이 현장에서 제대로 지켜지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러나 현장 기술자나 인부들과 숨바꼭질하듯 언쟁을 벌이다가 새참 시간이 되면 큰 대접에 막걸리를 가득 따라주고 함께 마시곤 하던 낭만도 있었다. 콘크리트는 막걸리 힘으로 비빈다는 말을 우스갯소리처럼 주고받던 때였다. 막걸리를 주고받으면서 인부들은 감독관의 술 실력을 시험하기도 했지만 이런 과정을 통해 현장 소통이 이뤄지고 이 소통이 향후 공사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도 깨달았다. 노련한 현장 기술자와 마음이 통하면 갑과 을에 관계없이 중요한 현장기술 노하우를 슬쩍 알려주기도 했던 것이다.
내가 군대생활 3년을 통해 누린 이런 행운은 이후 문화체육부에 근무하며 용산박물관 국제설계 공모 등의 업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자산이 됐다.
훈련은 훈련병을 육체적·정신적인 극한 상황까지 몰아가면서 강인한 군인으로 양성한다. 이 힘든 훈련과정에서 식사시간만큼은 에너지를 채워주는 달콤한 휴식의 시간이었다. 당시 해군 특교대 70차 교육을 담당했던 대장은 다른 훈련장교와 달리 식사시간과 훈련을 뚜렷하게 분리했다. 훈련은 엄격하게 하되 식사시간만큼은 조금이나마 여유를 가질 수 있게 한 것이다. 이런 공사의 구분을 분명히 함으로써 훈련대장은 지와 덕을 함께 갖춘 멋진 군인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지금까지도 훈련대장 그분만큼은 유독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내가 담고 싶은 지휘관 스타일이었다.
군생활을 통해 내가 지향할 수 있는 리더십을 배우고 현장의 소통법까지 배운 것은 내 평생의 정신적 자산으로 남았다.
김봉건 < 한국전통문화대 총장 >
해군 특교대는 입대 후 3개월간의 훈련기간을 거쳐 소위로 임관한다. 당시 해군과 해병이 합쳐지면서 훈련도 함께 받게 됐는데 훈련 강도가 상당했다.
해군 특교대에는 기수 전통이 있었다. 특교대 70차였던 나는 입소 초기 어느 날 밤, 동기생들과 함께 연병장에 집합해 70바퀴를 돌게 됐다. 평소 운동장 몇 바퀴도 뛰지 못했던 나는 육체적인 한계에 도달함을 느끼면서 70바퀴를 뛰었고 눈앞이 노래지는 경험을 난생 처음 하게 됐다. 육체적 한계까지 몰고가는 이 같은 훈련은 강한 정신력과 함께 전우들이 같이 움직이면 평소엔 상상할 수도 없는 힘이 발휘된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해줬다. 입대 초기 경험한 엄청난 강도의 육체적·정신적 훈련은 임관 뒤 군대생활은 물론 사회생활에서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이를 헤쳐나가게 해준 잠재적 원동력이 됐다.
훈련을 마친 뒤 진해 해군시설창으로 자대 배치를 받았다. 이곳에서 시설장교로, 건축공사 설계에서부터 발주와 감독에 이르는 전 과정을 경험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해군시설학교, 해군 군수지원사령부 건물 건설 등 다양한 공사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당시 건설공사 현장은 지금에 비하면 주먹구구식이었다. 학교에서 책으로 배운 지식이 현장에서 제대로 지켜지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러나 현장 기술자나 인부들과 숨바꼭질하듯 언쟁을 벌이다가 새참 시간이 되면 큰 대접에 막걸리를 가득 따라주고 함께 마시곤 하던 낭만도 있었다. 콘크리트는 막걸리 힘으로 비빈다는 말을 우스갯소리처럼 주고받던 때였다. 막걸리를 주고받으면서 인부들은 감독관의 술 실력을 시험하기도 했지만 이런 과정을 통해 현장 소통이 이뤄지고 이 소통이 향후 공사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도 깨달았다. 노련한 현장 기술자와 마음이 통하면 갑과 을에 관계없이 중요한 현장기술 노하우를 슬쩍 알려주기도 했던 것이다.
내가 군대생활 3년을 통해 누린 이런 행운은 이후 문화체육부에 근무하며 용산박물관 국제설계 공모 등의 업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자산이 됐다.
훈련은 훈련병을 육체적·정신적인 극한 상황까지 몰아가면서 강인한 군인으로 양성한다. 이 힘든 훈련과정에서 식사시간만큼은 에너지를 채워주는 달콤한 휴식의 시간이었다. 당시 해군 특교대 70차 교육을 담당했던 대장은 다른 훈련장교와 달리 식사시간과 훈련을 뚜렷하게 분리했다. 훈련은 엄격하게 하되 식사시간만큼은 조금이나마 여유를 가질 수 있게 한 것이다. 이런 공사의 구분을 분명히 함으로써 훈련대장은 지와 덕을 함께 갖춘 멋진 군인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지금까지도 훈련대장 그분만큼은 유독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내가 담고 싶은 지휘관 스타일이었다.
군생활을 통해 내가 지향할 수 있는 리더십을 배우고 현장의 소통법까지 배운 것은 내 평생의 정신적 자산으로 남았다.
김봉건 < 한국전통문화대 총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