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 "詩는 해방의 언어…그래서 제목 안 붙였지"
경계가 없다는 것만큼 고은 시인(사진)을 잘 설명해주는 말이 있을까. 55년의 시력(詩歷)을 쌓는 동안 시와 사상의 지평을 끊임 없이 확장해 온 그가 또다시 ‘무(無) 경계’의 새 시집을 발표했다. 무려 607편의 시가 1016쪽에 걸쳐 담긴 《무제 시편》(창비)이다.

시인이 서문에 ‘시의 유성우(流星雨)가 밤낮을 모르고 퍼부어 내렸다’고 적은 것처럼 그는 올 봄부터 여름까지 고작 반년 만에 방대한 규모의 시를 써냈다는 점에서 시간의 한계를 극복했다. 이 기간에 이탈리아 베네치아, 남아프리카공화국 중국 시베리아를 돌며 썼다는 점에서 물리적 경계 또한 뛰어넘었다. 여든의 나이에도 지치지 않는 창작력으로 활동하고 있는 시인에게는 나이의 경계도 중요치 않아 보인다.

말 그대로 제목이 없는 시집. 그는 18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출간 간담회에서 “내 시는 해방의 언어이지 명제나 고유명사에 속하지 않는다”고 했다. 하나의 제목을 지음으로써 시가 그 안에 갇혀온 관습에 회의가 들었다는 설명이다.

그래서 이번 시집에 실린 시들은 ‘무제 시편 1’부터 ‘무제 시편 539’까지다. 그 뒤에 경기 안성에서의 삶을 정리하는 ‘부록 시편’ 작품 68편을 붙였다. 시인은 최근 수원 광교산 자락으로 이주했다. 각각의 시에는 그의 큰 시 세계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감히 나는 달의 맹방(盟邦)임을/새삼스러이 선언하노라/지상의 아수라 국가들의 수교 따위가 아니라/나의 영원한 위성 달빛과의 우정을 선언하노라//때마침 오늘밤은 만월이므로/나는 자제하기 어려운 정욕(情慾)으로 울창하노라/내 전신은 밀물이다가/해일 직전이노라//태평양으로 가라/거기 태평양 전체의 평야 가득히/달빛의 야만을 퍼부어내리는/그 절경(絶景) 속으로 가라.’(‘무제 시편 3’ 부분)

시인은 무경계를 타고난 것처럼 보인다. 어릴 때부터 그림을 그리면 배 기차 철새와 같이 떠나는 것들만 그렸다는 시인답게 그는 고향을 따지지 않는다. “우주 도처가 고향”이라는 그는 6·25전쟁 당시 미군 병사가 했던 말을 간직하고 있다.

‘나는 네브래스카에서 태어났다. 그곳은 생의 고향이지만 나는 한국에서 죽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한국은 내 죽음의 고향이다.’

그러나 시인은 이제 수원에 정착해 현재 쓰고 있는 장시(長詩) 창작에 전념할 계획이다. 독일 베를린에서 1년간 머물며 오로지 글만 써달라는 초청도 받았고, 사르트르가 나온 파리고등사범학교에서 한국문학 강의를 해달라는 요청도 받았지만 장기 체류를 할 경우 사방에서 초청이 들어와 창작의 시간이 깨져버린다는 얘기다. 현재 시인은 수원 자택에서 밤에는 책에, 낮에는 원고지에 열광하는 삶을 살고 있다.

시가 외면받는 현실에 대해 그는 오히려 “시가 무력해야 할 때가 왔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20세기 내내 세계적으로 시의 영광이 지속돼 왔지만 지금쯤 와서는 시가 고개를 조금 숙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이 시대의 시인인 것을 최고의 축복으로 여긴다고 했다. “어떤 끝은 절대로 끝이 아니며 무력이야말로 나의 운명이 시작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박한신 기자 hansh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