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대마도
일본 규슈 본토에서 약 132km, 이키섬에서 73km, 한국 부산에서 49.5km. 대한해협 가운데에 떠 있는 대마도는 한·일 간의 중계지라는 특성 때문에 양국의 역사와 문화를 공유하고 있다. 이곳 사투리도 칭구(친구), 바치(바지), 팟다(팠다) 등 우리와 닮은 게 많다. 일본말 쓰시마의 유래 또한 두 개의 섬이라는 우리말 ‘두 섬’의 ㄷ이 ㅊ/ㅆ으로 변한 것이라고 한다.

삼국시대에 진도(津島)로 불렸던 대마도는 고려에 조공을 바치고 쌀·콩 등을 답례로 받아갔다. 그러나 왜구가 이곳을 근거지로 출몰하자 조선은 회유책과 귀화정책을 쓰다가 세 차례 정벌에 나서기도 했다. 먹을 게 귀한 데다 지리적 특수성까지 겹친 탓에 대마도주는 조선 국왕의 관직(예조참의급)과 일본 막부의 다이묘라는 직을 동시에 갖고 ‘줄타기 생존’을 모색했다.

임진왜란 때는 떠밀려 참전했지만 나름대로 전쟁을 막으려고도 했다. 왜란 발발 2년 전인 1590년 선조에게 일본 조총 몇 점을 진상했다. 하지만 조선은 총통보다 약한 조총을 무시했고 전쟁 후에야 이를 후회했다. 일본이 명분으로 내걸었던 ‘명으로 가고자 하니 길을 빌려 달라(假道入明)’라는 것도 원래 ‘명을 정벌하려 하니 길을 안내하라(征明嚮導)’는 강압적인 문구였던 걸 대마도주가 슬쩍 완화시킨 것이라고 한다.

제주도의 3분의 1 정도인 이 섬의 넓은 국도는 조선통신사를 위해 닦은 것이었다. 구타포의 오후나에 유적지는 조선에서 온 배가 입항했던 곳이고, 유스호스텔로 쓰이는 세이잔지(서산사)는 조선통신사가 머물던 장소다. 이곳에서 내려오는 길에는 일제의 강요로 대마도주의 후예와 정략결혼한 대한제국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의 봉축비도 있다.

대마도가 일본에 편입된 결정적인 계기는 공도(空島) 정책이었다. 치안 유지 비용을 줄이려고 주민들을 본토로 이주시켰던 것인데 울릉도가 무인도로 변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이는 일본의 독도 망언이 불거질 때마다 ‘대마도는 우리 땅’이라는 맞구호가 터지는 배경이기도 하다.

최근엔 악화된 한·일 관계 때문에 또다른 몸살을 앓고 있다. 그저께 일본 방위상이 한국인들의 숙박시설 투자 등을 문제 삼으며 “안보상 중요한 곳이기에 감시해야 한다”고 해서 더욱 시끄럽다. 아베 총리도 지난달 같은 말을 했다. 오죽하면 일본 내에서 “이런 것까지 문제 삼으면 관계가 더 경색될 것”이란 목소리가 커질까. 인구 3만여명에 불과한 곳에 한국 관광객이 연 15만명이나 되는데 말이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