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켓인사이트] '한국판 카길' 만든다더니…소리없이 청산

마켓인사이트 11월20일 오후 3시59분

‘한국판 카길’을 꿈꾸며 2011년 야심차게 출범한 곡물유통회사 ‘aT그레인컴퍼니(AGC)’가 2년반 만에 문을 닫는다. 자본잠식에 빠진 가운데 삼성물산 등 민간 투자사들이 추가 지원에 난색을 보이면서다. 충분한 준비 없이 의욕만 앞세웠다가 혈세(血稅)와 시간만 허비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연 215만t 들여오겠다더니…실적 ‘전무’

20일 자원투자업계에 따르면 농수산식품유통공사(aT)가 2011년 4월 민간 기업들과 합작 설립한 aT그레인컴퍼니가 지난 9월 말 미국 시카고 법원에 청산을 신청하고 관련 절차를 밟고 있다. 삼성물산과 한진, (주)STX 등 컨소시엄에 참여한 민간 회사들이 추가 투자를 거절하면서 법인 유지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aT그레인컴퍼니는 aT가 지분 55%를 출자해 자본금 250만달러 규모로 설립한 곡물 수입유통회사로 삼성물산 STX 한진이 15%씩 지분을 갖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2008년 국제곡물 가격 급등으로 식탁 물가가 뛰어오르자 국제곡물회사를 설립하기로 했다. 카길 같은 곡물 메이저를 통하지 않고 직거래가 가능해지면 좀 더 싸게 곡물을 들여올 수 있을 것이란 판단이었다.

2011년 4월 출범한 aT그레인은 2010년 기준 27.1%인 국내 곡물 자주율(국내 생산분에 해외에서 안정적으로 확보 가능한 물량을 합한 비율)을 2015년 55%까지 끌어올리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3년간 총 750억원의 예산이 aT에 지원됐다.

하지만 실적은 참담하다. aT그레인은 당초 2011년 10만t을 시작으로 2015년부터 연간 215만t의 곡물을 조달한다는 계획이었으나 2011년 시범적으로 대두(콩) 1만1000t을 도입한 뒤 ‘한 톨’도 들여오지 못했다.

산지 엘리베이터(현지 내륙운송시설) 10기 등 저장시설을 확보하겠다는 계획도 정보 부족과 기존 업체들의 ‘텃세’로 무산됐다. 엘리베이터 인수에서 엘리베이터를 보유한 회사의 인수합병(M&A), 소수 지분 투자로 계속해서 전략을 바꿔봤지만 여의치 않았다.

돈이 있어도 쓰지 못해 2011~2012년 aT에 지원된 예산 624억원 중 집행한 돈은 44억6800만원에 불과했다. 지난 10월 열린 국회 국정감사에서 민주당 배기운 의원과 박민수 의원 등이 “제대로 된 조사 없이 사업을 추진해 혈세만 낭비했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등 논란이 됐다.

aT그레인에 참여한 한 업체 관계자는 “출범할 때부터 현실성이 없다는 이유로 투자를 고사했는데 ‘반강제’로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며 “실현 가능한 계획을 세우기보다는 단기간에 뭔가 보여주기 위해 일부터 벌인 ‘전시행정’의 대표적 사례”라고 꼬집었다.

○“단기 성과에 급급한 게 패인”

전문가들은 단기 성과에 급급하며 사업을 추진한 당연한 결과라고 입을 모은다. 세계 곡물유통 시장은 카길·번기·아처대니얼스미들랜드(ADM)·드레퓌스 등 4대 곡물 메이저가 80% 가까이 장악하고 있다. 후발업체들의 신규 진입이 사실상 차단된 매우 폐쇄적인 시장이다. 시장 정보가 쉽게 공유되지 않는 데다 곡물 가격을 결정하는 변수도 다양하기 때문에 기초적인 시장조사부터 단계적으로 접근했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곡물 메이저들의 견제와 치밀한 방해공작도 끊이지 않았다.

농촌경제 관련 민간연구소인 GS&J인스티튜트의 이정환 이사장은 “비교적 성공적으로 국제곡물 시장에 진입한 젠노 등 일본 업체들은 수십년의 장기계획을 갖고 사업을 추진하다 침체 국면 저점에 매물로 나온 저장시설을 확보했다”며 “정부가 아닌 민간이 주가 돼 소액이라도 지분에 참여해 정보를 수집하면서 좋은 매물이 나오면 재빠르게 대응하는 방식의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농림축산식품부는 전략을 수정해 다시 한번 한국판 카길 프로젝트를 추진해보겠다는 방침이다. 농식품부 관계자는 “기획재정부에 예비타당성 조사를 신청한 상태이나 확정된 건 없다”며 “aT그레인을 반면교사로 삼아 민간 주도의 장기 프로젝트로 추진할 계획”이라고 했다.

이유정 기자 yj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