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맨해튼 하면 어떤 게 떠오르십니까. 많은 사람이 문화 패션 금융 등을 떠올리겠지만 사실 뉴욕은 하이테크 중심지입니다. 구글, 이베이,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트위터 등 굵직한 정보기술(IT) 기업들이 본부를 두고 있지요. 지난 10년간 이들 기업을 관통한 공통의 화두는 ‘혁신’입니다.”

세계적 디자인 명문 뉴욕 파슨스대의 에린 조 전략디자인경영학과 종신교수는 최근 혁신으로 성공한 기업의 공통점으로 ‘디자인적 경영전략’을 꼽으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요즘 소비자들은 어떤 제품의 혁신을 평가할 때 그 제품에 들어 있는 기술, 성능뿐 아니라 ‘나에게 어떤 의미있는 경험을 줄 것인가’를 기준으로 삼는다”고 강조했다. 올해 안식년을 맞아 서울대 경영대학 초빙교수로 활동하고 있는 에린 조 교수를 지난 21일 그의 연구실에서 만났다.

▷디자인적 경영전략이 무엇입니까.

“흔히 디자인과 경영의 접목을 ‘디자인만으로 경쟁 우위를 차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좋은 디자인이 제품의 가치를 끌어올리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지요. 하지만 이것이 디자인적 경영전략의 핵심은 아닙니다. 아름답고 보기 좋은 상품을 디자인하고 기술을 개발하기에 앞서 이 모든 것을 어디로 이끌고 나갈지 명확한 방향성을 정하는 게 더 중요합니다. 통찰력을 갖고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 이것이 ‘디자인적 경영전략’입니다.”

▷디자인 혁신은 어떤 것입니까.

“디자인과 혁신이 만날 때 두 가지 조합이 있습니다. 하나는 디자인 혁신이고 다른 하나는 디자인적 혁신전략입니다. 디자인 혁신은 새로운 디자인을 통해 미적 감각을 높이고 더 나은 속성을 개발하는 등 기존 상품이나 아이디어를 점진적으로 혁신하는 것입니다. 디자인적 혁신전략은 다릅니다. 디자인이나 기술을 통해 소비자의 사고와 행동 변화를 유도하는 것입니다. 완전히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는 전략입니다.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소비와 생산의 가치 공간을 창조해 그 안에서 마켓리더로서 경쟁적 우위를 차지하고자 하는 노력입니다.”

▷혁신이 기술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뜻인가요.

“요즘 소비자는 ‘경험’을 평가하고 ‘경험’을 삽니다. 결국 혁신은 인간을 위한 것이고요. 새로운 경험이 사람들의 삶의 질을 더 낫게 만들었을 때 의미있는 혁신이 가능하고 그런 혁신은 오래 지속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기술과 디자인을 개발하기 이전에 먼저 혁신으로 구현하고자 하는 경험이 무엇인지, 그 혁신의 경험이 주는 가치는 어떤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대표적인 사례를 꼽는다면.

“미국 경제지 패스트 컴퍼니는 2013년 가장 혁신적인 브랜드로 ‘나이키’를 꼽았습니다. 원래 뛴다는 것은 홀로 즐기는 외로운 스포츠입니다. 2006년 출시한 ‘나이키플러스’는 ‘뛰는 일은 외로울 필요가 없다’는 다른 방향성을 갖고 접근했습니다. 새로운 경험과 의미를 제시하기로 한 것입니다. 나이키플러스의 기술적 원리는 아주 간단합니다. 신발 깔창 밑에 아이팟 나노 모델과 무선으로 연동되는 수신기를 삽입해 이용자가 뛰는 기록을 저장할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개인 트레이너가 코치하듯 음성으로 현재까지 성과를 알려주고 응원합니다. 자신의 운동 기록을 다른 이들과 비교할 수 있게 했죠. 나이키플러스닷컴은 작년 7월 기준 약 700만명의 이용자가 가입해 하루 1000명이 넘게 등록하는 거대한 커뮤니티로 발전했습니다. 러닝화 시장에서 최고 브랜드에 오른 나이키는 ‘퓨얼밴드’라는 웨어러블 기기를 내놓고 이 분야에서 선두 주자가 됐습니다.”

▷한국 기업과 한국 브랜드는 어디쯤 와 있나요.

“한국은 뛰어난 기술력, 교육 수준, 디자인 역량 등 모든 면에서 세계적 수준입니다. 혁신을 주도할 탄약은 충분히 장전돼 있는데 의미있는 방향성을 찾아내는 데는 아직 취약합니다. 이달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브랜드 가치가 큰 기업 100’ 리스트에서 삼성이 9등, 현대가 81등을 했습니다. 그러나 인구 대비 가장 많은 특허를 보유하고 주요 글로벌 브랜드에 기술을 제공하는 나라의 성적 치고는 초라한 편이지요. 한국 기업의 브랜드 전략이 주로 기존 산업군에서 성공한 리더를 빨리 벤치마킹하는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 전략이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다만 삼성전자와 LG, 현대차, 기아차, KT, CJ 등 대기업을 중심으로 혁신의 진행 방향이 점차 소비자의 경험과 의미를 창조하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은 긍정적 변화입니다.”

▷급진적인 혁신은 대기업의 영역 아닙니까.

“10년 전까지 급진적 혁신에는 대규모 자본을 투입한 제품의 연구개발(R&D)이 중요했습니다. 기술의 발전이 곧 혁신의 전부라고 여기던 때였지요.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기술력과 디자인 능력으로만 보면 많은 경쟁자가 비슷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경쟁 우위는 모든 요소들을 잘 통합하고 진두지휘해 새로운 경험을 제시하는 기업이 차지합니다. 기술이 평준화 됐기 때문에 큰 자본이 없더라도 뛰어난 발상과 올바른 방향성을 제시하는 기업은 성공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뜻입니다.”

▷창의적인 사고와 통찰력은 타고나는 것인가요.

“혁신의 자질인 ‘창의성’이 선천적이냐 후천적이냐는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많은 사람이 창의성을 동물적 감각이자 본능, 특별한 유전자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이는 ‘경험을 바탕으로 한 사고의 과정’으로 봐야 합니다. 창의적인 사고와 그 결과물들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라 ‘통합적인 사고, 생각의 깊이, 끈질긴 근성’에서 나온 것이 많습니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를 포함해 테슬라 창업자인 엘론 머스크, 트위터와 스퀘어 창업자 짐 맥켈비, 다이슨 창업자 제임스 다이슨 등 혁신 브랜드의 리더들은 어린 시절부터 여러 분야에 관심을 두고 많은 경험을 했습니다. 특히 이들은 왜 다르게 하면 안 되느냐는 질문을 끝없이 던졌습니다. ‘왜 전기자동차는 허영심에 다가가면 안 되지? 왜 진공청소기는 먼지 봉투가 있어야 하지?’처럼 현상과 사물을 재해석한 것이 창조의 시작이었습니다.”

▷창의적인 것은 꼭 독창적이어야 합니까.

“창조라는 것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게 아니라 경험과 지식, 그것을 응용해 ‘엮어내는 능력’입니다. 파슨스 교육의 창의력은 ‘성찰(thoughtfulness), 고려(deliberation), 절제와 끈질김(discipline and tenacity), 통찰력(insight)’ 등을 키우는 데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창의력은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영감을 도출하고 통합(integration)하는 능력이며, 타인과 공감(empathy)으로 엮어갈 수 있는 능력입니다. 혁신은 이런 인재를 요구하고, 이런 인재상을 ‘H형 인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H형 인간’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요.

“H형 인간은 다중적인 관점을 갖고 자신의 경험과 전문성을 공감으로 연결시켜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입니다. 아이데오의 팀 브라운 최고경영자(CEO)는 성공적인 혁신 멤버의 조건으로 한 분야만 파고드는 ‘I자형 인간’ 대신 전공 분야 외에 다양한 경험과 지식을 가진 ‘T자형 인간’을 제시했습니다. 제가 제시하는 ‘H형 인간’은 전문성과 경험이라는 두 축을 토대로 내가 상대방의 입장이 돼 문제를 인지하고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디자인적 혁신의 적용 범위는 어디까지인가요.

“디자인적 혁신이 제시하는 것은 혁신에 대한 자세와 태도입니다. 교육·공기업 혁신 등 여러 분야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의미있는 경험을 디자인해준다는 것은 결국 수익 창출만이 목표가 아니라 더 나은 사회를 만들겠다는 의지입니다. 성장 자체만큼이나 성장을 위해 치러야 하는 값이 무엇인지도 동시에 고려하고, 창조하는 것만큼 낭비되는 것에 대해 창조적인 해결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디자인적 혁신’이 그 해결책을 찾아가는 길잡이가 될 수 있습니다.”

■ 에린 조 뉴욕 파슨스대 교수는

에린 조 뉴욕 파슨스대 전략디자인경영학과 종신교수는 브랜딩과 기업 혁신 노력에 ‘디자인적 경영전략’을 제시한다. 서울대 의류학과에서 학사와 석사를 마치고 미국 위스콘신대에서 글로벌 유통에 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8년 워싱턴주립대 조교수직을 시작으로 위스콘신대와 컬럼비아대에서 객원교수로 활동했다.

2006년부터 뉴욕 파슨스대에서 재직 중이며 급변하는 소비자 심리와 글로벌 기업 환경에서 보다 창의적인 기업 전략을 제시하는 강의로 유명하다. 올해 안식년을 맞아 서울대 경영대학 초빙교수로 활동하고 있으며 최근 ‘아웃런-경험과 상식을 뒤집어라(한국경제신문)’는 책을 출간했다.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