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금융사고
이완 맥그리거 주연의 ‘갬블’은 1995년 무모한 투자로 233년 전통의 영국 베어링은행을 말아먹은 닉 리슨(당시 28세)의 자서전 ‘악덕 중개인(Rogue Trader)’을 영화화한 것이다. 리슨은 인도네시아 채권으로 2000% 수익률을 올린 덕에 싱가포르지점 수석트레이더로 영전했다.

승승장구하던 그는 어느 날 실수로 생긴 손실을 숨기려고 깡통계좌를 만들고, 거래 규모를 키웠지만 손실은 더욱 눈덩이가 됐다. 단숨에 만회하려고 고베지진을 틈타 일본 주가지수선물에 ‘몰빵’했지만 결국 13억달러를 날렸다. 그 충격으로 베어링은행은 단돈 1파운드에 네덜란드 ING은행으로 넘어갔다.

그해엔 또 다른 대형 금융사고가 일본에서 터졌다. 다이와은행 뉴욕지점의 이구치 도시히데가 11년간 장부에 누락한 채 미 국채를 거래하다 11억달러를 날린 것이다. 리슨과 이구치는 출소 후 쓴 자서전으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다. 특히 리슨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투자위험을 분석·경고하는 고액 강사로 변신했다.

이들은 각기 1조원이 넘는 손실을 끼쳤지만, 직원 한 명이 낸 금융사고 중 역대 5위 안에도 못 낀다. 2008년 프랑스 소시에테제네랄은행의 제롬 케르비엘(당시 31세)은 대규모 불법 선물거래로 무려 71억달러의 손실을 냈다.

파생상품 거래가 활발해진 90년대 이후 대형 금융사고가 잦다. 미국 오렌지카운티 파산(1994년·손실액 17억달러), 헤지펀드 아마란스 파산(2006년·66억달러), 스위스 UBS은행 대규모 손실(2008년·20억달러) 등은 모두 직원 한 명이 초래한 금융사고다. 원금의 수십, 수백배를 거래하는 파생상품의 특성상 터졌다 하면 초대형 쓰나미다.

이에 비하면 연간 손실 총액이 1000억원 안팎인 국내 금융사고는 새발의 피다. 하지만 내용을 보면 내부통제가 그토록 허술할까 싶을 정도다. 최근 국민은행 본점의 90억원의 국민주택채권 사기는 비리 직원이 자리를 비운 사이 다른 직원이 이상을 발견할 때까지 은행 측은 까마득히 몰랐다. 사량수협의 190억원 횡령도 소문으로 떠돌던 의혹을 해경이 수사를 하고서야 잡아냈다고 한다. 순환근무나 명령휴가제만 잘 지켰어도 예방할 수 있었을 사고들이다.

금융당국이 외환위기 이후 15년 동안 내부통제 강화를 외친 게 무색하다. 2500조원의 유가증권을 보관하는 예탁결제원에선 올 들어 두 번이나 위조 주권이 발견됐다. 언제 어디서 무슨 사고가 터질지 알 길이 없다. 관치와 도덕적 해이가 어우러진 한국 금융의 총체적 위기다.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