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문찬기자  sweat@hankyung.com
허문찬기자 sweat@hankyung.com

"젊은 세대에게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라는 조언을 많이들 하는데, 저는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일을 다 해본 것도 아닌데 좋아하는 게 뭔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싫은 일도 최선을 다 해서 하는 게 더 중요합니다. 유리할 때도 불리할 때도 변하지 않아야 합니다."

윤용로 외환은행장의 이력은 화려하다. 행정고시에 수석 합격해 차관급 공무원(금융감독위원회 부위원장)까지 지낸 뒤 금융인으로 성공적으로 변신했다. 국책은행인 기업은행장을 거쳐 작년 초 시중은행인 외환은행장에 올랐다. 경제관료가 갈 수 있는 이상적인 코스를 밟고 있다는 평가다.

보통 사람은 한 가지도 달성하기 어려운 목표를 연이어 이뤄내고 있지만 그 자신은 ‘한 번도 목표했던 적이 없는 일들’이라고 말한다. 그는 “세상 사는 일 별거 없다는 생각으로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한 게 돌이켜 보니 비결이었다”고 했다. 윤 행장이 서울 용강동의 10년 단골 양갈비 전문점 ‘램랜드’에서 그의 삶을 풀어냈다.

○‘2차 인생’에서 ‘수석 합격’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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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길을 걷고 있는 윤 행장은 실제로 만나 보면 외모와 성격 모두 소탈함과 유머가 돋보인다. 시장 한복판에 있는 듯 주변이 소란스러운 음식점을 단골집으로 고른 데서도 면모가 드러난다. “제가 양띠이니 양고기를 먹는 건 동족상잔의 비극이지요. 그래도 매우 맛있어서 오지 않을 수가 없어요. 몸에도 좋고요.” 자리에 앉자마자 가벼운 농담으로 편안한 분위기를 만든다.

직접 호주산 양삼각갈비를 구우며 어린 시절 얘기부터 꺼냈다. “아버지가 회사원이셨는데 좀 일찍 돌아가셨어요.” 고교 3학년 때 일이다. “어머니가 형제를 키우느라 좀 힘드셨습니다. 그런데 어렵게 자랐다는 얘기는 기사에 쓰지 말아 주세요. 어머니가 내켜 하지 않아 불효입니다.”

윤 행장은 이어 유년시절의 실패담을 들춰 냈다. 제법 공부를 잘했지만 중학교와 고교 입시에서 1차에 줄줄이 낙방해 2차로 진학한 것이다. ‘2차 인생’은 대학입시에도 반복됐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해 입시에서 1차 대학마저 떨어졌습니다. 어머니가 많이 우셨지요.” 거듭된 낙방이 상처가 되지 않았느냐고 하자 그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 덕분에 겸손해 할 줄 알게 되고 결과적으로 좋은 약이 됐지요.”

대학(한국외국어대 영어과)에 들어갈 무렵 홀어머니는 서울 대림상가에 당구장을 열었다. 그는 당구대도 닦고 큐와 초크도 손질했다. 특히 혼자 오는 손님 상대는 윤 행장 몫이었다. “제가 이겨야 게임비를 받을 수 있잖아요. ‘목숨을 걸고 둔다’던 바둑기사 조치훈 못지않은 심정으로 열심히 쳤지요.” 감수성 짙은 청년의 마음을 멍들였을 것이 분명한 가정사를 그는 또 농담 속에 버무렸다.

윤 행장이 양갈비를 추가 주문했다. 옆 테이블에 양고기를 주식으로 하는 아랍지역 사람이 여럿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어떻게 좋아하는 것만 하고 살 수 있나”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고 싶다는 생각에 고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전공이 영어라 외무고시를 준비하다 곧 마음을 바꿨다. “외교관이 되면 해외에 나가야 하는데, 한국에 어머니만 혼자 두는 건 안 되겠다고 생각해 행시로 발을 돌렸지요.”

결과는 4학년 말의 수석합격이었다. 2차 인생이 드디어 수석으로 격상된 셈이다. “운이 좋았던 거지요. 시험 전날 밤 공부하고 간 기출문제가 다시 나왔더군요.” 자랑할 만도 하건만 이번에도 그는 특유의 소탈하고 멋쩍은 웃음으로 지나갔다. 매사 이런 식이다.

적극적으로 원한 길은 아니었지만 그는 공무원 생활에 보람을 느꼈다. 처음 발령받은 부서는 재무부 국세심판소. 세금에 불만이 있는 사람들의 청구를 심사하는 일을 했다. “한번은 김밥 장사를 하는 아주머니가 찾아왔어요. ‘1가구 1주택’은 비과세인데 양도세가 나왔다는 거예요. 알아보니 김밥집을 ‘집’으로 간주해 2주택으로 분류했더군요.” 윤 행장은 김밥집을 직접 방문해 2주택이 아니라고 판정하고 세금을 돌려줬다. “그 아주머니가 감사 편지와 함께 김밥을 가져왔습니다. 공무원으로 많은 일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하지만 날고 긴다는 엘리트 관료들만 모여서인지 윤 행장은 오랜 시간 변방을 돌았다. 당시 재무부 특유의 폐쇄적인 조직문화로 인해 비핵심부서로만 다녔다. ‘그래도 수석인데 억울했겠다’고 하자 그는 정색을 하며 불만은 없었고 오히려 많이 배우는 시기였다고 했다. “젊은 세대에게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라는 조언을 많이들 하는데, 저는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일을 다 해본 것도 아닌데 좋아하는 게 뭔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싫은 일도 최선을 다 해서 하는 게 더 중요합니다. 유리할 때도 불리할 때도 변하지 않아야 합니다.”

○“평상심을 유지하고 낙천적이어야 이긴다”

윤 행장의 이 같은 평상심을 높이 산 사람이 이규성 전 재무부 장관이다. 윤 행장은 1988년 이 전 장관 비서로 발탁됐고 그 뒤 핵심부서였던 이재국 은행과로 옮겼다. 숨겨둔 실력을 발휘하며 ‘에이스 본색’을 드러낼 기회가 온 것이다.

“사람이 살다 보면 올라갈 때도 있고 내려갈 때도 있죠. 올라간다고 해서 과도하게 들떠도 안 되지만, 내려갈 때도 너무 힘들어할 필요 없습니다. 오히려 마음을 더 편하게 먹으면 됩니다. 다시 올라갈 일이 생기니까요.”

양갈비로 배를 채우고 나자 양고기 전골이 나왔다. 들깨와 깻잎을 넣고 라면 사리를 얹어 끓여낸 얼큰한 맛이 입에 감겼다. 와인을 한 모금 곁들이던 윤 행장이 말을 이었다. “하루하루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다 보니 지금 자리까지 왔습니다. 생각해 보면 딱히 꿈은 없었습니다. 결과는 생각하지 말고 힘껏 기를 쓰고 달리는 게 중요합니다.”

그가 풀어낸 얘기를 관통하는 코드는 낙천성이란 생각이 들었다. 순탄치 않은 성장과정이었지만 누구보다도 낙천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은 어디서 온 것일까. 그는 아버지 얘기를 꺼낸다. “아버지 임종을 했습니다. 어머니 무릎을 베고 누워 있다 어느 순간 다리를 쭉 뻗더니 조용히 눈을 감으시더라고요. 그 장면은 항상 뇌리에 남아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시면서 준 가르침이라는 생각이 스치더군요. 아무렇지도 않은 마지막을 보여 주시면서 ‘세상 사는 일 별거 없다’는 말씀을 하시려던 거라고요. 잘나간다고 자만해서도 안 되고 욕심을 부리면서 연연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요.”

○“외환은행에 절호의 기회 왔다”

와인이 몇 잔 더 돌자 가족 얘기도 나왔다. 윤 행장은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되는 큰아들을 군대에 보냈다. 그 아들은 윤 행장이 미국 미네소타대에서 유학 하던 시절에 태어나 미국 국적이었다. “어렵게 한국 국적을 회복시켜서 군대에 보냈습니다. 군대에서 평생 만나기 힘든 팔도의 사나이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일도 해 보고 그런 시절의 인연이 인생의 자산이 될 것이란 지론이다.

자신이 외환은행과 인연을 맺은 사연도 들려줬다. “은행과에서 처음 담당한 업무가 당시 국책은행이던 외환은행 민영화였습니다. 그때 만난 외환은행 직원들에게 금융에 대해 배우게 됐습니다. 그로부터 23년 뒤에 은행장이 되리라곤 꿈도 꾸지 못했죠.”

그는 외환은행이 과거의 아픔과 결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론스타에 인수된 후 수익성 위주의 경영에 치중해 고객 기반과 성장잠재력이 크게 훼손됐다는 지적이다. “론스타 시절엔 직원들이 정해진 업무만 해 창의성을 발휘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윤 행장은 은행의 미래에 자신감을 내비쳤다. “위기 다음에는 기회가 옵니다. 국내 금융산업은 해외 진출이라는 새로운 돌파구가 절실한 상황이 됐죠. 국제 분야에서 최고의 역량을 가진 외환은행에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별 욕심 없이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는 그의 목표가 궁금해졌다. 그는 얼마전 세계신기록을 세운 스케이팅 이상화 선수가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한 답에 공감했다며 그대로 옮겼다. “잘 모르겠네요. 일단은 있는 힘껏 계속 기를 쓰고 달려야 합니다. 다른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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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고기 전문점. 삼각갈비가 대표 메뉴다. 누린내 없는 1년 미만의 호주산 양고기를 3일 동안 숙성한 뒤 참숯에 구워낸다. 10년 이상 경력의 직원들이 직접 고기를 구워준다. 특제 소스에 양고기를 찍어 멕시코식 전병인 토르티야에 올리고 마늘 올리브 옥수수 등을 얹어 싸 먹으면 담백한 맛을 즐길 수 있다. 들깨와 깻잎을 넣어 얼큰하게 끓인 양고기 전골도 인기 메뉴다. 라면 사리를 넣어 먹을 수 있다. 소주 안주로 제격이다. 삼각갈비는 1인분에 2만5000원, 전골은 1만3000원이다. 영업시간은 오전 11시30분~오후 10시. 점심·저녁 시간은 자리가 없을 정도로 붐벼 예약을 하는 것이 좋다. (02)704-0223

김일규 기자 black0419@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