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터를 훔친 여인들', 생략하고 건너뛰고…생뚱맞은 전쟁역사극
500석 규모의 중극장에서 올리려던 연극이 공연장 문제로 200여석의 소극장으로 옮겨 왔다는 사실이 선입견으로 작용했을까. 좁고 갑갑했다. 무대와 객석 등 물리적 공간 뿐이 아니다. 방대한 전쟁 역사극에 참으로 많은 것을 얘기하려는 작가의 욕심을 채우기엔 2시간의 짧지 않은 상연 시간이 모자라 보였다.

서울 서계동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공연중인 국립극단의 ‘전쟁터를 훔친 여인들’은 원래 리뉴얼 공사중인 장충동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의 재개관작으로 제작됐다. 신예 작가 김지훈과 중견 연출가인 김광보의 만남, 이호재 오영수 길해연 김재건 정태화 등 중량감 있는 배우들의 출연으로 올 하반기 기대작으로 일찌감치 주목받았다.

하지만 공사 지연으로 개막을 3주 정도 남기고 공연장이 국립극단 전용 극장으로 바뀌었다. 예매를 통해 관람권이 상당 부분 팔린 시점이었다. 이로 인해 관람권 가격은 절반 이하로 떨어졌지만, 앉아있기 불편하고 방음도 부실한 공연장이 아닌 시설 좋은 공연장에서 관람하기를 기대한 관객들에게는 적지 않은 실망감을 안겼다.

객석 규모에 비해 깊이있는 무대를 가진 공연장 구조를 효율적으로 활용한 무대 구성과 연출은 인상적이다. 후방 공간까지 관 모양의 나무 상자를 겹겹이 쌓아 산을 형상화한 계단식 무대를 분할해 이야기를 진행한다. 연극으로 치면 블록버스터 규모인 24명의 출연진이 무대 옆 의자에 앉아 있다가 들락날락하며 연기한다. 효율적인 동선으로 속도감을 높이지만 옹색한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극은 “새벽밥을 먹고 세운 나라가 저녁밥을 먹을 무렵 망한다”는 난세가 배경이다. 나라를 세우려는 미명 하에 허황된 건국신화를 만들어내고 전쟁과 살상을 자행하는 도련님과 그의 군대, 본의 아니게 산봉우리 전쟁터를 훔친 화전민 여인들을 대립시켜 피로 물들어 온 인간 세상의 원형과 본질을 드러내려고 한다.

극은 속도감있고 촘촘하게 흘러가지만 이야기 전개를 따라가기 힘들다. 당초 4시간 짜리 대본을 2시간으로 줄여서일까. 건너뛰고 생략된 부분이 많아 정리하기 쉽지 않다. 도련님과 대장군의 위상과 심리 변화 과정이 분명치 않다. 도련님 군대와 싸우느라 ‘제 코가 석자’인 화전민 여인들이 처형 위기에 몰린 도련님의 생모를 구출하려는 장면은 생뚱맞을 뿐아니라 시공간적으로 설득력이 없다.

공연장을 나온 관객들이 주고받는 얘기 중에는 “연극이 형이상학적”이라는 촌평이 많았다. 극중 문관들이 수없이 외치고 머리를 조아려 숭배하는 ‘형이상학’의 본래 의미가 아니라 ‘극내용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뜻으로 들렸다. 공연은 오는 8일까지,1만~3만원.

송태형 기자 toughl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