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핑크 슬립 : 해임 통보 >
삼성 계열사 CEO들은 4일 바쁜 하루를 보냈다. 오전에 삼성전자 서초사옥에서 열린 수요 사장단 회의에 참석한 뒤 곧바로 수십통의 전화를 걸어야 해서다. 그룹 차원에서 5일 임원 인사를 하기 전 승진자와 퇴임자들에게 인사 내용을 통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주로 전화로 통보가 이뤄지는 게 관례다. 승진하는 임원에겐 축하 인사를 하고 퇴직 임원에게는 위로와 격려의 말을 건넨다. 이메일 혹은 문자메시지나 ‘핑크 슬립(분홍색 해고통지서)’ 등으로 해임 통보를 하는 외국 기업과는 다르다는 게 삼성 측의 설명이다. 핑크 슬립은 미국 포드사가 업무 성과에 따라 분홍색 종이로 해임 통보를 한 것에서 유래됐다.
삼성의 핑크 슬립에는 원칙이 있다. 승진자보다 퇴임자를 먼저 챙긴다. 성향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대부분의 CEO는 승진 임원보다는 퇴임자에게 먼저 전화하고 따로 만나곤 한다. 단체로 만나는 경우도 있지만 1 대 1로 석별의 정을 나눌 때도 적지 않다. 해외 출장 중인 임원과 시차가 맞지 않아 통화가 어려우면 먼저 문자메시지를 남긴다.
그룹 차원의 임원 인사 발표 전날까지 이런 작업을 하기에는 시간이 빠듯하다는 게 CEO들의 설명이다. 삼성에서는 매년 300~500명가량의 임원이 승진하고 그 정도의 임원이 옷을 벗는다.
삼성은 퇴직 임원들에게 다양한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수십년 동안 회사를 위해 노력한 공로를 인정함으로써 임직원들의 사기를 높이려는 취지에서다. 협력회사에 재취업할 수 있도록 적극 다리를 놓아주고 일정 기간 현직의 70~80% 급여와 차량, 사무실 등을 제공한다. 직급에 따라 퇴직자에겐 최대 2년 임기의 자문역을 맡긴다.
현대자동차그룹은 전무 이상 퇴직 임원을 1~2년간 자문역이나 상임고문으로 위촉한다. 이들에겐 현직 때 연봉의 50%를 준다. LG그룹은 사장급 이상 퇴직자에 대해 최대 2년간 고문, 이후 최대 2년간 자문역으로 예우해준다.
또 그룹별로 모임을 만들어 퇴직 임원들이 교류할 기회도 준다. 삼성 성우회(800여명), LG크럽(200여명), SK 유경회(200여명), 두산회(200여명) 등이 대표적이다.
정인설 기자 surisur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