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넬슨 만델라 잠들다] 자유를 향한 '한 세기의 여정' 마침표…"굿바이 만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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넬슨 만델라 95세 일기로 타계
인종차별 맞서 평생 투쟁…무기징역 선고받고 27년 복역
남아공 첫 흑인대통령 된 뒤 백인들에 용서·화해의 손길
'흑백화합 상징'으로 남아
두 차례 방한 YS·DJ 만나
인종차별 맞서 평생 투쟁…무기징역 선고받고 27년 복역
남아공 첫 흑인대통령 된 뒤 백인들에 용서·화해의 손길
'흑백화합 상징'으로 남아
두 차례 방한 YS·DJ 만나
“나는 일생 동안 아프리카인의 투쟁에 헌신해왔다. 모든 사람이 조화롭고 평등한 기회를 갖고 함께 살아가는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이상을 간직해왔다. 필요하다면 그 소망을 위해 죽을 준비가 돼 있다.”
1964년 4월20일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 법원에서 내란 혐의로 재판받던 수인번호 ‘46664’번의 넬슨 만델라는 이렇게 말했다.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던 정치범은 30년 뒤 남아공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됐다. 그리고 평생 소망대로 ‘흑백 화합의 상징’으로서 영원한 이름을 남기고 5일(현지시간) 요하네스버그 자택에서 95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제이컵 주마 남아공 대통령은 이날 긴급 성명을 통해 “남아공의 위대한 아들을 잃었다”고 만델라의 사망 소식을 전했다. 만델라는 지난 6월 지병인 폐감염증이 재발해 병원에 입원했다가 석 달 만에 퇴원했다. 하지만 건강이 호전되지 않아 자택에서 의료진의 치료를 계속 받아왔다.
한 세기에 가까운 굴곡진 세월을 살아낸 만델라는 용서와 화합의 정신을 몸으로 실천한 정치인으로서 세계인들의 존경을 받았다. 특히 갈등 대신 공존을, 증오 대신 화해를 택한 그의 행보는 모두의 귀감이 됐다.
○27년 수감생활도 못 꺾은 저항정신
만델라는 1918년 7월 남아공 이스턴케이프주 음베조에서 템부족 족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흑인들이 다닐 수 있는 대학이었던 포트헤어대에서 법학을 전공하던 만델라는 1940년 인종차별 반대 시위를 주동해 대학에서 제적당했다.
그는 1944년 아프리카민족회의(ANC)에 가담, ANC청년동맹을 이끌면서 본격적으로 인종차별 철폐 투쟁에 뛰어들었다. 또 1952년엔 남아공에서 흑인 최초로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다. 흑인은 법조인이 될 수 없다는 인종차별법에 대항한 것이었다.
1960년 샤프빌 흑인 대학살 사건이 일어난 뒤 만델라는 무장투쟁 게릴라 노선을 걷게 됐다. 1962년 8월 체포당한 그는 1964년 6월 내란음모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훗날 그를 계속 괴롭힌 폐감염증도 교도소 내 채석장에서 일하다 얻은 지병이었다.
로벤섬 교도소에서 27년 동안 복역한 만델라는 감옥에 갇힘으로써 오히려 세계적인 인권운동 투사로 이름을 알리게 됐다. 그는 오랜 수감생활 중 ‘지구상에서 가장 유명한 정치범’이란 수식어도 얻었다. 1979년엔 옥중에서 자와할랄네루 상을, 1981년과 1983년엔 각각 브루노 크라이스키 인권상과 유네스코의 시몬 볼리바르 국제상을 받으며 세계 인권운동의 상징적 존재로 인정받았다.
○남아공 첫 흑인 대통령
1990년 2월11일, 만델라는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됐다. 만델라는 흑인과 백인 간 화해를 이끌기 위해 노력했다. 흑백 대립이 남아공을 피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을 수 있을 것이란 우려 때문이었다.
1991년 남아공 최대 흑인 정치단체인 ANC 의장이 된 만델라는 프레데리크 데 클레르크 당시 대통령과 흑백 연합 정부 구성을 위해 협상했다. 흑인 강경파의 반발도 심했지만 만델라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의 목표는 흑인과 백인이 하나로 뭉쳐 평화롭게 공존하는 ‘무지개 나라’의 실현이었다.
1994년 5월10일, 만델라는 남아공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과거 백인들만 출입할 수 있었던 요하네스버그 유니언빌딩 정부청사에서 만델라는 당당히 대통령 취임식장에 섰다. 340여년간 이어진 백인 통치의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었다.
○독재 유혹 벗어나 평화주의 길 택해
1994년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 만델라는 측근들로부터 ‘종신 대통령직’을 제안받았다. 그러나 그는 거절했다.
만델라는 1999년 대통령직 퇴임 후 자선단체인 넬슨만델라재단을 설립했다. 또 2004년엔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공직과 관련된 모든 활동을 중단하겠다고 발표한 뒤 어린 시절을 보낸 남아공 남부 쿠누로 거처를 옮겼다. 이듬해엔 자신의 장남 마가토 만델라가 에이즈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고백하며 “에이즈 감염 사실을 공개하는 것만이 에이즈를 결핵이나 암처럼 보통 병으로 느끼게 할 수 있다”고 호소했다.
유엔은 2009년 만델라의 생일인 7월18일을 ‘넬슨 만델라의 날’로 제정, 이날 하루 적어도 67분간은 남을 위해 봉사하자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67이란 숫자는 만델라가 민주화 운동에 투신해 대통령을 거쳐 공적 사회활동에서 은퇴하기까지 67년 동안 사회와 국가를 위해 헌신한 점을 기념하자는 뜻에서 비롯됐다.
○한국과도 각별한 인연 … 두 차례 방한
만델라는 생전에 한국을 두 번 방문했다. 1995년 7월엔 김영삼 전 대통령을, 2001년 3월엔 김대중 전 대통령을 만났다.
특히 김대중 전 대통령과는 옥살이를 겪고 노벨평화상을 받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아시아의 만델라’로 불리기도 한 김대중 전 대통령은 생전에 만델라의 자서전인 ‘자유를 향한 머나먼 여정’ 한국어판을 번역했다.
만델라가 최근 한국과의 인연을 이어간 것은 삼성전자가 그의 고향 쿠누에 마을회관을 건립한 사업을 들 수 있다. 삼성전자 아프리카법인은 쿠누에 2011년 11월 3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다목적 지역사회센터를 세웠다.
이미아 기자 mia@hankyung.com
1964년 4월20일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 법원에서 내란 혐의로 재판받던 수인번호 ‘46664’번의 넬슨 만델라는 이렇게 말했다.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던 정치범은 30년 뒤 남아공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됐다. 그리고 평생 소망대로 ‘흑백 화합의 상징’으로서 영원한 이름을 남기고 5일(현지시간) 요하네스버그 자택에서 95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제이컵 주마 남아공 대통령은 이날 긴급 성명을 통해 “남아공의 위대한 아들을 잃었다”고 만델라의 사망 소식을 전했다. 만델라는 지난 6월 지병인 폐감염증이 재발해 병원에 입원했다가 석 달 만에 퇴원했다. 하지만 건강이 호전되지 않아 자택에서 의료진의 치료를 계속 받아왔다.
한 세기에 가까운 굴곡진 세월을 살아낸 만델라는 용서와 화합의 정신을 몸으로 실천한 정치인으로서 세계인들의 존경을 받았다. 특히 갈등 대신 공존을, 증오 대신 화해를 택한 그의 행보는 모두의 귀감이 됐다.
○27년 수감생활도 못 꺾은 저항정신
만델라는 1918년 7월 남아공 이스턴케이프주 음베조에서 템부족 족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흑인들이 다닐 수 있는 대학이었던 포트헤어대에서 법학을 전공하던 만델라는 1940년 인종차별 반대 시위를 주동해 대학에서 제적당했다.
그는 1944년 아프리카민족회의(ANC)에 가담, ANC청년동맹을 이끌면서 본격적으로 인종차별 철폐 투쟁에 뛰어들었다. 또 1952년엔 남아공에서 흑인 최초로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다. 흑인은 법조인이 될 수 없다는 인종차별법에 대항한 것이었다.
1960년 샤프빌 흑인 대학살 사건이 일어난 뒤 만델라는 무장투쟁 게릴라 노선을 걷게 됐다. 1962년 8월 체포당한 그는 1964년 6월 내란음모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훗날 그를 계속 괴롭힌 폐감염증도 교도소 내 채석장에서 일하다 얻은 지병이었다.
로벤섬 교도소에서 27년 동안 복역한 만델라는 감옥에 갇힘으로써 오히려 세계적인 인권운동 투사로 이름을 알리게 됐다. 그는 오랜 수감생활 중 ‘지구상에서 가장 유명한 정치범’이란 수식어도 얻었다. 1979년엔 옥중에서 자와할랄네루 상을, 1981년과 1983년엔 각각 브루노 크라이스키 인권상과 유네스코의 시몬 볼리바르 국제상을 받으며 세계 인권운동의 상징적 존재로 인정받았다.
○남아공 첫 흑인 대통령
1990년 2월11일, 만델라는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됐다. 만델라는 흑인과 백인 간 화해를 이끌기 위해 노력했다. 흑백 대립이 남아공을 피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을 수 있을 것이란 우려 때문이었다.
1991년 남아공 최대 흑인 정치단체인 ANC 의장이 된 만델라는 프레데리크 데 클레르크 당시 대통령과 흑백 연합 정부 구성을 위해 협상했다. 흑인 강경파의 반발도 심했지만 만델라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의 목표는 흑인과 백인이 하나로 뭉쳐 평화롭게 공존하는 ‘무지개 나라’의 실현이었다.
1994년 5월10일, 만델라는 남아공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과거 백인들만 출입할 수 있었던 요하네스버그 유니언빌딩 정부청사에서 만델라는 당당히 대통령 취임식장에 섰다. 340여년간 이어진 백인 통치의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었다.
○독재 유혹 벗어나 평화주의 길 택해
1994년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 만델라는 측근들로부터 ‘종신 대통령직’을 제안받았다. 그러나 그는 거절했다.
만델라는 1999년 대통령직 퇴임 후 자선단체인 넬슨만델라재단을 설립했다. 또 2004년엔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공직과 관련된 모든 활동을 중단하겠다고 발표한 뒤 어린 시절을 보낸 남아공 남부 쿠누로 거처를 옮겼다. 이듬해엔 자신의 장남 마가토 만델라가 에이즈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고백하며 “에이즈 감염 사실을 공개하는 것만이 에이즈를 결핵이나 암처럼 보통 병으로 느끼게 할 수 있다”고 호소했다.
유엔은 2009년 만델라의 생일인 7월18일을 ‘넬슨 만델라의 날’로 제정, 이날 하루 적어도 67분간은 남을 위해 봉사하자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67이란 숫자는 만델라가 민주화 운동에 투신해 대통령을 거쳐 공적 사회활동에서 은퇴하기까지 67년 동안 사회와 국가를 위해 헌신한 점을 기념하자는 뜻에서 비롯됐다.
○한국과도 각별한 인연 … 두 차례 방한
만델라는 생전에 한국을 두 번 방문했다. 1995년 7월엔 김영삼 전 대통령을, 2001년 3월엔 김대중 전 대통령을 만났다.
특히 김대중 전 대통령과는 옥살이를 겪고 노벨평화상을 받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아시아의 만델라’로 불리기도 한 김대중 전 대통령은 생전에 만델라의 자서전인 ‘자유를 향한 머나먼 여정’ 한국어판을 번역했다.
만델라가 최근 한국과의 인연을 이어간 것은 삼성전자가 그의 고향 쿠누에 마을회관을 건립한 사업을 들 수 있다. 삼성전자 아프리카법인은 쿠누에 2011년 11월 3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다목적 지역사회센터를 세웠다.
이미아 기자 mi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