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넓고 숨을 곳은 많다?…"지구 끝까지라도 쫓아가 잡는다"
적색수배·여권말소로도 조양은 검거 진척없자
유엔 네트워크 동원…경찰, 체포 총력전
총기 소유 안되는 카지노 입장때 작전개시…필리핀 경찰이 붙잡아
부실한 사법공조…복잡한 송환절차로 아직도 많은 범인들, 해외서 도피행각
국내 수사망을 피해 해외로 달아난 범죄자들을 송환해온 소식을 간헐적으로 접하지만 조씨 송환 과정은 ‘권선징악’과 ‘사필귀정’으로 결론나는 할리우드판 액션 영화와는 얼개가 사뭇 다르다. 국제범죄 조직원 등 ‘글로벌 범죄자’가 아니라면 느슨한 협의체 수준인 국제형사경찰기구(인터폴)나 해당국 경찰의 공조를 기대하기 힘든 게 현실이다. 한국은 세계 77개국과 범죄인 인도조약을 맺고 있지만, 해당 국가 외교부의 요청으로 현지 경찰이 수사에 나서 재판까지 거치다 보면 수년이 걸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현재 해외 도피 사범은 1000명이 넘지만 최근 5년간 국내로 송환된 범죄자는 100명이 채 안 되는 것도 이런 맹점 탓이다.
◆유엔 나서자 필리핀 경찰이 움직였다
김모 서울청 광역수사대 강폭력1팀 반장은 지난 1월 지인을 통해 유엔마약범죄사무소(UNODC)에서 근무하는 A씨를 만났다. 그는 한국인으로 퇴역 군인이었다. UNODC는 세계 불법 마약 유통 및 국제 테러 등에 대처하는 유엔 산하기구로 국제범죄 수사에 폭넓은 네트워크와 정보를 가진 조직이다.
김 반장이 A씨를 만난 이유는 조씨가 필리핀으로 도피했다는 첩보를 받은 지 1년6개월이 넘도록 수사가 진척이 없어서다. 지난해 1월 인터폴이 적색 수배를 내린 데 이어, 3월에는 외교부를 통해 조씨의 여권을 말소해 필리핀에서 강제 추방할 수 있는 근거도 마련했다. 하지만 국제법상 한국 경찰이 해외에서 직접 수사를 진행할 수 없는 데다 현지 수사당국이 적극적으로 수사에 나서지 않아 사건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김 반장에게 자초지종을 전해들은 A씨는 UNODC의 네트워크를 활용할 것을 권했다. A씨는 즉각 필리핀 현지 UNODC 지부에 조씨의 불법 도피 사실을 알렸고, 필리핀 지부 직원은 지난 9월 그가 클락특별경제지구에 거주한다는 사실을 확인해 한국에 알려왔다.
경찰은 소재지가 확인되자 11월 공식적으로 UNODC에 협조 공문을 보냈다. UNODC 필리핀 지부 직원의 물밑 작업도 계속됐다. 필리핀 수사당국에 조씨가 한
의 유명한 조폭 두목이고 필리핀 현지에서도 말썽을 일으킬 수 있다는 점을 들어 검거를 촉구했다. 한 국제범죄 전문가는 “필리핀에서는 범죄를 저질러도 돈만 주면 풀려나는 경우가 많은데, 유엔의 개입이 이 같은 검은 뒷거래를 차단하는 효과가 있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윤해성 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UNODC의 인적 네트워크를 활용한 조씨 검거 사례는 의미가 크다”고 평가했다.
◆범죄인 인도조약 무용지물
국내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해외로 도피한 범죄자는 1160여명에 달한다. 이 중 최근 5년간 범죄인 인도와 강제 추방 조치를 통해 국내로 송환한 범죄인은 86명에 불과하다.
해외 도피 사범이 증가하는 데 비해 강제 소환 실적이 미미한 것은 ‘범죄인 인도조약’이 사실상 무용지물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1999년 12월 미국을 시작으로 필리핀 태국 등 77개국과 해외 도피 사범의 국내 송환이 가능토록 범죄인 인도조약을 맺고 있다. 범죄인 인도조약은 절차가 복잡하고 송환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단점이 있다. 범죄인 인도 청구는 경찰·검찰→법무부→외교부→상대국 외교부→상대국 수사기관으로 이어지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 청구에만 수개월이 걸리고, 현지 경찰에 범죄자가 붙잡힌다고 하더라도 현지 송환 재판 과정이 수년간 이어지기도 한다.
◆허술한 국제 공조…필리핀은 ‘도피천국’
전문가들은 국가 간 사법 공조 및 네트워크가 부실한 상황에서는 한번 해외로 나가 그 사회에 조용히 숨어지내면 사실상 소재 파악이 불가능하다고 지적한다. 국제범죄 전문가는 “해외 도피범들에게 세상은 넓고 숨을 곳은 많다”고 현실을 개탄했다. 장우성 서울시경 광역수사대 강폭력계장은 “범죄자들은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드는데 이들을 붙잡아야 할 경찰은 그렇지 못해 수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범죄인의 소재지 파악을 위해 경찰의 현지 탐문을 허용하는 외교적 조치가 이뤄지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국가 간 사법당국의 공조가 쉽지 않은 필리핀은 그동안 국내 범죄자들에게 ‘도피천국’으로 알려져 왔다. 경찰은 필리핀에 140여명의 도피 사범이 숨어든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게다가 이들은 현지에서 한국 교민과 관광객을 대상으로 납치 등 범죄도 일삼고 있다. 조씨도 현지 교민을 상대로 공갈·협박을 일삼으며 생활비와 도박자금을 마련한 것으로 전해졌다. 전문가들은 총기를 쉽게 살 수 있는 필리핀의 특성상 도피 사범들이 경제적 어려움을 겪으면 협박과 납치·강도 살인 등 범죄의 유혹에 쉽게 빠져든다고 설명했다. 장준오 형사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해외 도피 사범의 한국인 대상 범죄가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며 “정부의 적극적 대책 마련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이지훈/홍선표 기자 liz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