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자신에게 선물하는 세대
한 해가 저물어 가는 요즘 인터넷에서 흥미로운 기사를 발견했다. “올 크리스마스나 연말에 자신에게 선물할 의향이 있는지” 물어본 결과 10명 중 7명이 “물론 그렇다”고 응답했다는 것이다. 자신에게 선물하고픈 아이템으론 명품 핸드백, 화장품 세트가 압도적 지지를 받았고, 뮤지컬 음악회 등의 공연이 뒤를 이었다 한다. 물론 2530세대 여성들 이야기다.

구세대로선 자신에게 선물한다는 아이디어가 꽤나 신선하게 다가오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왠지 불편함을 숨길 수 없다. 아마도 선물 속에 필히 담겨야 하는 건 누군가를 향한 감사의 마음이나 정성스런 배려여야 한다는 고정관념 탓에 그럴 게다.

이 뜬금없는 고정관념은 어디서 왔을까 생각을 더듬다 보니 어린 시절 기억이 떠오른다. 해마다 이맘때 즈음이면 엄마는 털장갑 털모자 털양말 내복 등 겨울나기용 소품을 준비하시곤 했다. 어느 해인가는 당신이 직접 털목도리를 뜨기도 하셨다. 그렇게 준비한 조촐한 선물들은 아침저녁 신문배달을 해주던 코흘리개 소년에게, 사시사철 언덕길 오르내리던 연탄 배달부 아저씨에게, 죽은 아내를 대신해 아이들 홀로 키우며 살아가는 이웃의 아빠에게 건네졌다.

선물이란 타인을 위한 것이려니 생각해온 구세대로서, 자신을 위한 선물을 준비한다는 신세대의 상큼한 생각에 딴지를 걸고픈 이유가 있다. 공공장소에서 주위 시선은 아랑곳없이 애정표현을 서슴지 않는 것은 물론이요, 대중교통이든 엘리베이터든 타고 내릴 때 연장자에 대한 배려를 조금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요즘 젊은이들 세태일진대, 늘 자신을 중심으로 세상을 살아가노라니 선물도 자신에게 주고픈 마음이 이는 것 아니겠는지.

하기야 한국의 신세대만 그런 것은 아닌 듯하다. 사회 트렌드 자체가 국가와 민족을 앞세우거나 대의명분을 중시하던 것으로부터, 살아 숨 쉬는 개인의 실제 삶 자체에 관심을 모으고 실용과 실리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변화해가고 있음은 동서양의 차이가 없는 듯하다. 혹자는 이를 일컬어 자아(self)의 확대라 표현하기도 하고, 큰 구조(big structure)로부터 작은 이야기들(small narratives)로 패러다임 전환이 이뤄지는 중이라 하기도 한다.

자신의 삶에 지극히 충실한 세대를 향해 “선물이란 타인에게 감사를 표하는 것이란다” 식의 구태의연한 충고를 하고자 함은 아니다. ‘아프니까 청춘인 세대’엔 어쩌면 자신을 위한 선물이 일종의 ‘힐링’ 경험이 될 수도 있겠다. 이해가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정작 선물을 필요로 하는 이웃에 대한 관심은 찾아보기 어려운 듯하여 이들을 향한 아쉬움이 남고, ‘물질 가는 곳에 마음 간다’는 소비 자본주의의 폐해가 선물 항목에 너무 솔직히 드러나고 있어 걱정이 고개를 든다.

오래전 마흔 살 된 여성 여섯 명이 모여 책을 한 권 내곤 조촐하게 이를 기념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자리를 뜨기 전 글에 대한 보답으로 작은 항아리 선물을 받았는데, 그 항아리 속엔 수녀님들께서 직접 메주를 띄워 알맞게 곰삭힌 된장이 가득 담겨 있었다. 평생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선물로 기억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이병률의 산문집 ‘끌림’에는 이탈리아 여행길에 베네치아에서 머물렀던 한 민박집에서 뜻밖의 선물을 만났을 때의 잔잔한 감동이 실려 있다. 이 민박집에 머물다 떠나는 여행객은 다음에 올 여행객을 위해 선물을 남겨두고 간다는 게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이로부터 예기치 않은 선물을 받던 때의 설렘도 좋았지만, 다시 미지의 누군가를 위해 선물을 준비할 때의 두근거림도 잊지 못할 추억이었노란 고백이다.

신문배달 소년도 연탄 배달부도 이젠 만나기 어렵지만, 누군가를 향한 감사의 마음이나 전하고픈 정성은 남아있을 터. 올해는 예전 엄마의 마음이 돼 무늬만의 선물이 아닌 ‘진짜’ 선물을 준비해야 할까 보다.

함인희 < 이화여대 사회학 교수 hih@ewha.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