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포럼] 한국인만 모르는 6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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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
세계는 다 아는데 한국인만 모르는 세 가지가 있다는 얘기가 지난해 한때 회자됐었다. 북핵이 얼마나 위험한지, 일본과 중국이 얼마나 센지, 그리고 한국이 얼마나 부러움을 사는 나라인지.
지금도 똑같다. 세계가 북핵과 체제급변을 염려해도 한국인은 ‘설마 동족을…’이라는 반응에서 별로 달라진 게 없다. 세계 2, 3위 경제대국을 “차이가 나서 ‘차이나”라거나, ‘쪽바리’라고 얕보는 나라가 또 있을까 싶다. 최빈국에서 두 세대 만에 선진국 문턱에 다가섰어도 국민 다수는 여전히 늘 배고프고 배 아프다. 자기존중이라고 보기에는 다소 심한 나르시시즘이자 ‘나는 특별하다’는 자기선택적 편향이다.
이익집단이 더 크게 공익 외쳐
요즘 벌어지는 사건들을 보면 한국인만의 독특한 심리현상이 세 가지쯤 더 있는 것 같다. 이익집단이 더 큰소리로 정의를 외치는 가치의 전도, 문 열면 다 망한다는 쇄국 본능, 그리고 강자는 모두 악(惡), 약자는 무조건 선(善)이라는 언더도그마가 바로 그것이다. 지도층까지 예외가 없는 걸 보면 한국인의 유병률이 두드러진 증상이다.
코레일 노조가 내건 파업 명분은 소위 서민 요금폭탄 등 ‘공공성 훼손’을 막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KTX를 자주 타본 사람들은 요금이 해마다 야금야금 오르고, 할인혜택은 대폭 줄어 불만이 많다. 요금이 안 내려가는 것이 100년 독점 공기업의 방만경영, 과잉인력에 원인이 있음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그럼에도 노조는 민영화도 아닌 것을 민영화 프레임에 넣고, 기득권 투쟁을 공익 투쟁으로 가장한 것이다. 의약단체들이 내거는 ‘국민건강 훼손’이 연상된다. 공익을 강하게 외치는 사람 치고 공익을 위해 일하는 사람을 못 봤다는 애덤 스미스의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다.
개방의 혜택을 누리는 사람일수록 거꾸로 개방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것도 아이러니다. 세계 230여개국과 교역하는 나라에서 자유무역협정(FTA) 얘기만 나오면 머리띠를 두른다. 여태껏 닫아건 분야가 문제였지, 개방해서 망한 분야는 없다. 스크린쿼터를 줄였더니 할리우드 영화가 한국 영화의 개봉 시기를 피해 갈 정도다. 그런데도 과거 극장에 뱀을 풀었던 영화인들은 사죄 한마디 없이 아직도 투쟁 투쟁이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모두가 언더독 되겠다는 사회
가치 전도와 쇄국 본능은 약자를 자처해 대중의 심정적 지지를 얻으려는 언더도그마로 귀결된다. 국회의원들조차 “우리 같은 서민…”이라고 할 정도니 국민 대다수는 스스로를 서민·빈곤층으로 여기게 마련이다. 시위대가 주말 도심을 마비시켜도, 동양 기업어음(CP) 투자자들이 임직원을 무릎 꿇려도 그냥 대강 넘어간다. 피해자라면 무한 면죄부가 주어지는 모양이다.
그 대신 성공한 자, 큰 것은 끊임없는 공격대상이 된다. 대기업만 붙들어매면 골목상권이 살 것이란 착각 속에 규제를 쏟아낸 지 벌써 2년이 지났다. 유감스럽게도 골목상권이 부활했다는 소리를 들을 수 없다. 침체원인은 자영업 경쟁압력에다 골목이 줄고 소비자 선호가 달라진 데 있다. 진단이 잘못됐는 데 처방이 들을 리 없다.
약자 응원은 자연스런 심리다. 문제는 그런 심리가 점차 사회 도그마로 굳어지고 있는 점이다. 삼성의 최대 위협은 애플이 아니라 언더도그마 리스크라고 할 정도다. 모두가 밑에 깔린 언더독(underdog)이 되겠다는 희한한 사회로 가고 있다.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
지금도 똑같다. 세계가 북핵과 체제급변을 염려해도 한국인은 ‘설마 동족을…’이라는 반응에서 별로 달라진 게 없다. 세계 2, 3위 경제대국을 “차이가 나서 ‘차이나”라거나, ‘쪽바리’라고 얕보는 나라가 또 있을까 싶다. 최빈국에서 두 세대 만에 선진국 문턱에 다가섰어도 국민 다수는 여전히 늘 배고프고 배 아프다. 자기존중이라고 보기에는 다소 심한 나르시시즘이자 ‘나는 특별하다’는 자기선택적 편향이다.
이익집단이 더 크게 공익 외쳐
요즘 벌어지는 사건들을 보면 한국인만의 독특한 심리현상이 세 가지쯤 더 있는 것 같다. 이익집단이 더 큰소리로 정의를 외치는 가치의 전도, 문 열면 다 망한다는 쇄국 본능, 그리고 강자는 모두 악(惡), 약자는 무조건 선(善)이라는 언더도그마가 바로 그것이다. 지도층까지 예외가 없는 걸 보면 한국인의 유병률이 두드러진 증상이다.
코레일 노조가 내건 파업 명분은 소위 서민 요금폭탄 등 ‘공공성 훼손’을 막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KTX를 자주 타본 사람들은 요금이 해마다 야금야금 오르고, 할인혜택은 대폭 줄어 불만이 많다. 요금이 안 내려가는 것이 100년 독점 공기업의 방만경영, 과잉인력에 원인이 있음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그럼에도 노조는 민영화도 아닌 것을 민영화 프레임에 넣고, 기득권 투쟁을 공익 투쟁으로 가장한 것이다. 의약단체들이 내거는 ‘국민건강 훼손’이 연상된다. 공익을 강하게 외치는 사람 치고 공익을 위해 일하는 사람을 못 봤다는 애덤 스미스의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다.
개방의 혜택을 누리는 사람일수록 거꾸로 개방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것도 아이러니다. 세계 230여개국과 교역하는 나라에서 자유무역협정(FTA) 얘기만 나오면 머리띠를 두른다. 여태껏 닫아건 분야가 문제였지, 개방해서 망한 분야는 없다. 스크린쿼터를 줄였더니 할리우드 영화가 한국 영화의 개봉 시기를 피해 갈 정도다. 그런데도 과거 극장에 뱀을 풀었던 영화인들은 사죄 한마디 없이 아직도 투쟁 투쟁이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모두가 언더독 되겠다는 사회
가치 전도와 쇄국 본능은 약자를 자처해 대중의 심정적 지지를 얻으려는 언더도그마로 귀결된다. 국회의원들조차 “우리 같은 서민…”이라고 할 정도니 국민 대다수는 스스로를 서민·빈곤층으로 여기게 마련이다. 시위대가 주말 도심을 마비시켜도, 동양 기업어음(CP) 투자자들이 임직원을 무릎 꿇려도 그냥 대강 넘어간다. 피해자라면 무한 면죄부가 주어지는 모양이다.
그 대신 성공한 자, 큰 것은 끊임없는 공격대상이 된다. 대기업만 붙들어매면 골목상권이 살 것이란 착각 속에 규제를 쏟아낸 지 벌써 2년이 지났다. 유감스럽게도 골목상권이 부활했다는 소리를 들을 수 없다. 침체원인은 자영업 경쟁압력에다 골목이 줄고 소비자 선호가 달라진 데 있다. 진단이 잘못됐는 데 처방이 들을 리 없다.
약자 응원은 자연스런 심리다. 문제는 그런 심리가 점차 사회 도그마로 굳어지고 있는 점이다. 삼성의 최대 위협은 애플이 아니라 언더도그마 리스크라고 할 정도다. 모두가 밑에 깔린 언더독(underdog)이 되겠다는 희한한 사회로 가고 있다.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