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펙과 학점을 위해 졸업을 미루고 5년 이상 대학을 다니는 ‘모라토리엄족(族)’이 올해 9만명을 넘어선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10월31일 서울 여의도 국제금융센터(IFC)에서 열린 ‘2013 글로벌기업 채용박람회’가 구직자들로 붐볐다.  한경DB
스펙과 학점을 위해 졸업을 미루고 5년 이상 대학을 다니는 ‘모라토리엄족(族)’이 올해 9만명을 넘어선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10월31일 서울 여의도 국제금융센터(IFC)에서 열린 ‘2013 글로벌기업 채용박람회’가 구직자들로 붐볐다. 한경DB
대학생들이 대기업과 금융회사 등 양질의 일자리만 가려고 졸업을 늦추면서 ‘대학 7~8학년’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사회봉사와 어학연수 등 취업에 유리한 스펙도 쌓아야 하고 재수강을 해서라도 학점을 높이려는 학생들이 꾸준히 늘어나면서다. 대학도 이들 ‘모라토리엄족’에 부담을 느끼면서도 졸업 유예를 대부분 받아들이고 있다.

○주요 대학 3000명 이상 졸업 유예


남학생 8년·여학생 6년은 기본…캠퍼스 안떠나는 '모라토리엄족'
한양대 상경계열에 2004년 입학한 김모씨는 10년째 대학을 다니고 있다. 입학 당시 자유로운 대학 분위기에 젖다 보니 학점이 별로 높지 않았던 그는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 후 본격적으로 재수강을 통해 학점을 높여왔다. 틈틈이 모 대학병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비를 번 그는 여전히 공기업 외에는 가지 않겠다며 졸업을 늦추고 있다. 김씨는 “주변에 나 같은 친구가 적지 않다” 며 “남학생들은 군대를 포함해 8년, 여학생들은 6년 정도는 학교를 다니는 게 기본”이라고 말했다.

졸업을 늦추는 학생이 늘어나면서 서울지역 주요 사립대는 정원보다 30~40% 이상 많은 학생들이 교정을 채우고 있다. 연세대는 지난 4월 현재 등록 재학생이 1만9226명으로 편제 정원(1만3860명)보다 38.7% 많다. 정원외 입학을 10% 정도로 잡더라도 3900여명의 학생이 8학기 이상 대학을 계속 다니는 것으로 분석된다. 성균관대 건국대 고려대 등도 졸업을 늦춘 학생이 3000여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대학들은 졸업생 취업률이 대학 평가의 가장 중요한 지표인데다 학생들이 추가 학기를 수강하면서 등록금을 적게라도 내고 있어 졸업을 늦추는 것을 용인하고 있다. 연세대는 2010년 재수강이 가능한 학점 요건을 D+ 이하에서 C+ 이하로 완화했다. 경영학을 복수전공하는 A씨는 “시험을 치르고 B학점이 예상되면 C학점으로 낮춰달라고 교수에게 요청하는데 흔쾌히 들어주는 편”이라고 말했다.

○고려대 재수강 제한키로

대학들도 졸업을 늦추는 학생들이 반가운 것만은 아니다. 학생들이 누적되면서 도서관 등 학교시설에 대한 부담이 늘어나는데다 대학 평가의 주요 지표 가운데 하나인 교원 확보율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대학들은 최근 재수강을 제한하는 정책을 조심스레 내놓고 있다. 고려대는 나쁜 학점을 재수강을 통해 좋게 만드는 ‘학점 성형’을 줄이기 위해 학사운영 규정을 개정키로 했다. 고려대생이 취업 등의 이유로 발급받는 성적증명서에는 재수강 기록을 남기기로 했다. 예전에는 재수강하면 이전 수강기록과 학점이 지워졌지만 앞으로는 이전 기록과 재수강 기록을 모두 표기하기로 했다. F학점을 받아 재수강할 경우 ‘NA’(Not Account·반영 안함)로 표기하기로 했다.

연세대도 지난해 학칙을 다시 개정해 재수강을 원칙적으로 금지했지만 재수강 요건을 D+로 되돌리는 방안은 학생들의 반대로 성사시키지 못했다. 이화여대와 숙명여대는 재수강을 하더라도 최고 A- 이상의 학점을 받지 못하도록 했고 성균관대도 B+ 이상을 못받게 한다.

김병도 서울대 경영대학장은 “기업가 정신과 도전정신 없이 정형화된 길만 가려고 하는 사회 전체의 인식이 바뀌어야 모라토리엄족도 줄어들 것”이라고 지적했다.

정태웅/강현우 기자 redae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