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인플레 부른 통화팽창 정책…케인스 경제학 무너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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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경제를 바꾼 사건들 (14) 19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
자유주의 신봉자 닉슨 대통령, 재선 노리고 '케인시안' 선언…金본위제 버린 新경제정책 실시
달러가치 하락하고 물가 상승…비용절감 위한 해고 늘며 스태그플레이션만 일으켜
유동성 확대로 생긴 現금융위기, 양적완화로 해결하려 한다면 70년대 美 실수 반복될 수도
한국경제·한국제도경제학회 공동기획
세계경제를 바꾼 사건들 (14) 19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
자유주의 신봉자 닉슨 대통령, 재선 노리고 '케인시안' 선언…金본위제 버린 新경제정책 실시
달러가치 하락하고 물가 상승…비용절감 위한 해고 늘며 스태그플레이션만 일으켜
유동성 확대로 생긴 現금융위기, 양적완화로 해결하려 한다면 70년대 美 실수 반복될 수도
한국경제·한국제도경제학회 공동기획
제2차 세계대전 이후 30년간 세계 경제학계를 지배했던 케인스(그림) 경제학이 무너지는 사태가 1970년대에 일어났다. 경기가 침체하고 실업이 증가하면서 가격 인플레이션이 일어나는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 현상이 발생했던 것이다. 당시 케인스 경제학을 바탕으로 하는 주류 경제학에서는 인플레이션과 실업률 간에 ‘트레이드 오프’(trade-off·상쇄)가 존재하므로 어느 한쪽을 올려서 다른 한쪽을 낮출 수 있다는 필립스 곡선 이론을 신봉했다. 실업률을 낮추고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인플레이션 정책을 쓸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나타나자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당황했다.
미국의 경우를 보면 1973년 2분기부터 6분기 동안 연속으로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이 내려갔으며, 실업률은 1973년 5%에서 1975년 중반엔 1930년대 대공황 이후 최고치인 9%까지 치솟았다. 한편 인플레이션율은 1973년 3.4%에서 9.6%로 3배나 뛰어오른 후 1974년 2월부터 1975년 4월까지 계속 10~12%에 놓여있었다. 이 같은 현상은 미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영국 서독 일본 등 세계 주요 국가들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스태그플레이션의 원인을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원유 감산 조치로 인한 유가 상승에서 찾았다. OPEC은 1973년 10월~1974년 1월에 석유가격을 배럴당 3달러에서 11.65달러로 4배 가까이 인상했다.
물론 유가 폭등이 스태그플레이션을 촉발시킨 요인이 됐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아니었다. 근본 원인은 하이에크가 주장한 대로 케인스 이론에 바탕을 둔 정부의 확대 재정 및 통화 정책에 있었다.
1970년대 들어 미국을 비롯한 주요 선진국에 경기후퇴가 찾아왔다. 미국은 1970년 GDP가 0.5% 하락했다. 실업률은 6.1%로 올라갔다. 1960년대 확대 통화정책으로 인해 가격 인플레이션은 최고조에 달한 상황이었다.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브레턴우즈 협정에 따라 대외결제에 금본위제를 실시한 달러가 다른 국가들의 화폐와 금에 대해 심각하게 과대평가됐다.
1972년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을 노리던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인플레이션 없이 실업률은 낮추고 경제를 진작시킬 방법을 강구했다. 자유시장을 신봉하고 경제규제를 기피하던 닉슨이 갑자기 “나는 케인시언이다”고 선언한 뒤 대통령 선거가 1년여 남은 1971년 8월 무역적자를 해결하기 위해 금본위제를 버리면서 달러 가치를 하락시켰다. 그리고 닉슨의 지지자였던 밀턴 프리드먼(反케인스학파 창시자로 불리는 자유주의 경제학자)을 깜짝 놀라게 할 임금·물가 통제를 포함하는 ‘신경제정책’을 실시했다.
미국이 금본위제를 폐기하자 금 가격은 온스(28.35g)당 36달러에서 120달러로 폭등했고 달러 가치가 급락했다. 달러 가치 하락은 미국의 수입물가 인상으로 이어졌다. 수입가격이 올라갔지만 미국 기업들은 임금·물가 통제로 인해 제품가격을 올릴 수 없었다. 비용을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규제 때문에 임금 역시 인하할 수 없었기에 노동자들을 해고해야만 했다. 결과적으로 실업이 늘고 경제 성장은 둔화됐다.
미국의 경기부양을 위한 확대 통화정책은 통화량 데이터에서도 나타난다. 세계은행 자료에 따르면 미국 통화 증가율은 1970~1980년에 매년 10.99%씩 증가했다. 제1차 스태그플레이션 직전인 1970~1973년에는 통화 증가율이 연평균 12.23%에 이르렀고, 1974년에 7.85%로 잠시 낮아졌다가 1975년부터 다시 높아져 1975~1980년에 연평균 10.70%를 기록했다.
미국 달러 급증으로 달러 가치가 하락하자 환율을 안정시키기 위해 세계 각국은 자국의 통화를 경쟁적으로 풀어댔다. 자국 화폐의 가치 상승으로 인한 수출경쟁력 약화를 막기 위함이었다. 그 결과 전 세계적으로 유동성이 급증했고 유가 등 원자재 가격을 끌어올렸다. OPEC의 감산조치는 유가 상승을 가중시키는 역할을 했다.
통화를 늘리면 일시적으로 경제가 ‘붐(boom)’을 이룬다. 그러나 그러한 붐은 자원이 충분히 확보된 상태에서 일어난 것이 아닌 인위적인 것이어서 반드시 ‘버스트(burst)’가 온다. 그리고 불황에 빠진다. 이 불황을 치유하는 방법은 잘못된 투자가 조정될 때까지 인내하는 방법밖에 없다. 만일 정부가 불황을 치유하기 위해 통화팽창정책을 지속해 나간다면 불행을 초래한 원인으로 다시 불행을 치유하려는 것이 돼 훨씬 심각한 위기를 맞게 될 뿐이다. 불황이 길어지는 상황에서 계속된 통화팽창으로 인해 인플레이션이 초래되는 것이다. 불황 속에 인플레이션, 즉 스태그플레이션이 나타난다. 이것이 지속되면 심각하고도 급속한 인플레이션, 즉 하이퍼인플레이션 위험이 뒤따르게 되는 것이다.
19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은 이러한 과정의 결과였다. 1960년대 확대 통화정책으로 인한 붐과 버스트 이후의 경기침체를 잠깐 겪고 넘어갔으면 그렇게 심한 고통을 겪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불황을 타개하려는 정부의 무리한 확대 재정 및 통화정책으로 불황은 더욱 깊어졌고 인플레이션의 고통까지 겪었다. 당시 스태그플레이션은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가 하이에크의 조언에 따라 정부의 시장 개입을 줄이고 엄격한 통화관리를 시행한 후 해결됐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양적완화 정책이 우려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과다한 유동성 문제로 생긴 문제를 다시 유동성 확대로 풀려고 하고 있어서다.
미국의 경우를 보면 1973년 2분기부터 6분기 동안 연속으로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이 내려갔으며, 실업률은 1973년 5%에서 1975년 중반엔 1930년대 대공황 이후 최고치인 9%까지 치솟았다. 한편 인플레이션율은 1973년 3.4%에서 9.6%로 3배나 뛰어오른 후 1974년 2월부터 1975년 4월까지 계속 10~12%에 놓여있었다. 이 같은 현상은 미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영국 서독 일본 등 세계 주요 국가들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스태그플레이션의 원인을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원유 감산 조치로 인한 유가 상승에서 찾았다. OPEC은 1973년 10월~1974년 1월에 석유가격을 배럴당 3달러에서 11.65달러로 4배 가까이 인상했다.
물론 유가 폭등이 스태그플레이션을 촉발시킨 요인이 됐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아니었다. 근본 원인은 하이에크가 주장한 대로 케인스 이론에 바탕을 둔 정부의 확대 재정 및 통화 정책에 있었다.
1970년대 들어 미국을 비롯한 주요 선진국에 경기후퇴가 찾아왔다. 미국은 1970년 GDP가 0.5% 하락했다. 실업률은 6.1%로 올라갔다. 1960년대 확대 통화정책으로 인해 가격 인플레이션은 최고조에 달한 상황이었다.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브레턴우즈 협정에 따라 대외결제에 금본위제를 실시한 달러가 다른 국가들의 화폐와 금에 대해 심각하게 과대평가됐다.
1972년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을 노리던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인플레이션 없이 실업률은 낮추고 경제를 진작시킬 방법을 강구했다. 자유시장을 신봉하고 경제규제를 기피하던 닉슨이 갑자기 “나는 케인시언이다”고 선언한 뒤 대통령 선거가 1년여 남은 1971년 8월 무역적자를 해결하기 위해 금본위제를 버리면서 달러 가치를 하락시켰다. 그리고 닉슨의 지지자였던 밀턴 프리드먼(反케인스학파 창시자로 불리는 자유주의 경제학자)을 깜짝 놀라게 할 임금·물가 통제를 포함하는 ‘신경제정책’을 실시했다.
미국이 금본위제를 폐기하자 금 가격은 온스(28.35g)당 36달러에서 120달러로 폭등했고 달러 가치가 급락했다. 달러 가치 하락은 미국의 수입물가 인상으로 이어졌다. 수입가격이 올라갔지만 미국 기업들은 임금·물가 통제로 인해 제품가격을 올릴 수 없었다. 비용을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규제 때문에 임금 역시 인하할 수 없었기에 노동자들을 해고해야만 했다. 결과적으로 실업이 늘고 경제 성장은 둔화됐다.
미국의 경기부양을 위한 확대 통화정책은 통화량 데이터에서도 나타난다. 세계은행 자료에 따르면 미국 통화 증가율은 1970~1980년에 매년 10.99%씩 증가했다. 제1차 스태그플레이션 직전인 1970~1973년에는 통화 증가율이 연평균 12.23%에 이르렀고, 1974년에 7.85%로 잠시 낮아졌다가 1975년부터 다시 높아져 1975~1980년에 연평균 10.70%를 기록했다.
미국 달러 급증으로 달러 가치가 하락하자 환율을 안정시키기 위해 세계 각국은 자국의 통화를 경쟁적으로 풀어댔다. 자국 화폐의 가치 상승으로 인한 수출경쟁력 약화를 막기 위함이었다. 그 결과 전 세계적으로 유동성이 급증했고 유가 등 원자재 가격을 끌어올렸다. OPEC의 감산조치는 유가 상승을 가중시키는 역할을 했다.
통화를 늘리면 일시적으로 경제가 ‘붐(boom)’을 이룬다. 그러나 그러한 붐은 자원이 충분히 확보된 상태에서 일어난 것이 아닌 인위적인 것이어서 반드시 ‘버스트(burst)’가 온다. 그리고 불황에 빠진다. 이 불황을 치유하는 방법은 잘못된 투자가 조정될 때까지 인내하는 방법밖에 없다. 만일 정부가 불황을 치유하기 위해 통화팽창정책을 지속해 나간다면 불행을 초래한 원인으로 다시 불행을 치유하려는 것이 돼 훨씬 심각한 위기를 맞게 될 뿐이다. 불황이 길어지는 상황에서 계속된 통화팽창으로 인해 인플레이션이 초래되는 것이다. 불황 속에 인플레이션, 즉 스태그플레이션이 나타난다. 이것이 지속되면 심각하고도 급속한 인플레이션, 즉 하이퍼인플레이션 위험이 뒤따르게 되는 것이다.
19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은 이러한 과정의 결과였다. 1960년대 확대 통화정책으로 인한 붐과 버스트 이후의 경기침체를 잠깐 겪고 넘어갔으면 그렇게 심한 고통을 겪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불황을 타개하려는 정부의 무리한 확대 재정 및 통화정책으로 불황은 더욱 깊어졌고 인플레이션의 고통까지 겪었다. 당시 스태그플레이션은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가 하이에크의 조언에 따라 정부의 시장 개입을 줄이고 엄격한 통화관리를 시행한 후 해결됐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양적완화 정책이 우려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과다한 유동성 문제로 생긴 문제를 다시 유동성 확대로 풀려고 하고 있어서다.